우상을 섬기던 저희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그 은혜 못 잊어

이순자 권사(3) / 부산 가야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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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어머니는 우리가 미신을 섬겼던 것을 두고 “어떻게 해야 그 죄를 씻을 수 있겠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면 어떻게 이 죄를 벗고 가겠니?” 하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때 전도를 강조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게 되면서 저와 어머니는 같이 전도하기로 결심하고, 예전에 사당에 와서 제를 올렸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당을 섬겼을 때 저희 부모님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공경했던 그분들은 사당을 없애고 전도관을 세운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굉장히 못마땅한 태도로 저희를 대했습니다. 그래도 꼭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진심을 담아 저희 식구의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10년 넘게 섬기던 사당을 저희가 왜 없앴겠습니까? 참길을 깨닫고 보니 그렇게 위하고 받들던 것이 다 헛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당 없애고 전도관 세운 것을 못마땅해하는 이웃을 전도
전도 위해 몇십리나 되는 구불구불한 험한 산길을 다녀도
저도 모르게 힘이 나며 날아가듯 가볍게 산을 넘어

예전에 사당을 섬겼던 집으로 제단 교인들과 같이 심방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집의 아주머니도 저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차마 문전 박대는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아주머니와 함께 교인들이 둘러앉아 찬송을 하는데 한마음으로 간절하게 찬송을 부르면서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두 뺨 위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찬송 소리를 들었던 그 집의 대학생 아들이 “저렇게 진실하게 찬송하고 믿는 곳이라면 어머니가 나가시는 게 좋겠어요.” 하고 권유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사당에서 복을 비는 것만 알았던 동네 사람들이 ‘구원과 성신’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은암제단에 찾아오는 수가 점점 늘어 갔습니다.

연기군 눌왕리에서 전도를 하셨던 어머니는 연기군 군수(故 이선구)의 부인을 소개받아 그 가정을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민간신앙으로 칠성당을 섬기던 군수 내외 분은 집 안에 칠성단을 크게 마련해 두고 매일 절을 올리며 지성으로 받들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 집을 전도하면서 칠성단을 정리하자고 설득하여 결국 깨끗이 치우게 되었고, 그 일이 1962년 4월 신앙신보에 “칠성당 청산(淸算), 입교”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습니다. 두 분은 은암전도관까지 먼 길을 왕래하며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다가, 얼마 후 눌왕리에 전도관을 세워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한번은 한의원을 경영하는 큰집의 예닐곱 살 되는 조카딸이 귓병으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문병한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약을 모두 써 봤지만 누런 고름이 줄줄 나올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서 가족들 모두 속을 태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축복 캐러멜을 지니고 있었던 저는 “갖은 약을 다 써도 안 나았으니 제가 하는 대로 한번 해 봅시다.” 하고 이야기한 후, 축복 캐러멜을 녹여 납작하게 만들어서 아픈 귀에 붙여 주었습니다.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에 조카를 봤더니, 언제 고름이 나왔던가 싶게 상처가 깨끗이 아물어 완전히 나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의사인 시숙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며 무척 신기해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하심을 분명히 체험하면서 마음이 그렇게 든든하고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조카가 낫는 것을 지켜보았던 작은집 동서와 시누이가 큰 관심을 보이면서 전도관에 대해 알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은혜 받은 이야기와 하나님 말씀을 전하자 동서와 시누이가 무척 좋아하며 더 듣고 싶어해서 그때부터 매일 70리 길을 걸어서 공주군 사곡면 월가리의 작은집으로 심방을 다녔습니다. 그렇게 전도된 식구들이 집과 가까운 공주제단에 나가게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시동생까지 전도되어 지금도 기장신앙촌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에 자동차도 드물었던 그때, 심방을 가기 위해 몇십 리 되는 길을 걸어 다녀도 조금도 피곤한 줄 모르고 험한 산 고개를 날아가는 듯 가볍게 넘어 다녔습니다. 심방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면 저도 모르게 힘이 솟아나며 아무리 먼 거리도 한달음에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만나서 이야기를 전하려고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이사한 저는 범천제단에 다니던 중에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충남 연기군의 고향 집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위암 투병 중에도 큰 고통 없이 지내시던 아버지는 가족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소식을 들은 제단 교인들이 밤을 새워 가며 장례 준비를 도와주었으며, 입관예배 때 남자 관장님들이 시신을 생명물로 씻기는 동안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생명물로 깨끗이 씻은 후 아버지는 온몸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노긋노긋하게 피었으며 뽀얗고 환한 얼굴이 그렇게 평안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이 피는 것을 처음 봤던 젊은 교인들은 생전보다 훨씬 고운 아버지의 모습에 놀라고 신기해하면서,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칠 때까지 계속 찬송을 부르며 함께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를 보내 드리는 그때, 저는 여러 가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사당을 모두 치워 버린 것을 아시고 온몸을 떨며 분해하시던 아버지, 호랑이처럼 엄하고 무서우셨던 아버지가 기쁘게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시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 안찰을 받고 환하게 웃으시던 아버지의 미소……. 그토록 귀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함께하여 주시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1987년부터 부산 가야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헛된 우상을 섬기던 저희 가족들이 하나님을 깨닫고 다 함께 찬송하던 그 순간은 평생토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 가지 복을 받은 세월 동안 은혜 주시는 대로 아름답게 살지 못한 제 자신이 안타깝고 죄송할 뿐이지만, 지금도 한없이 허락해 주시는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찬송을 드립니다. 구원을 주시는 이 길을 끝까지 따라서 그날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뵈옵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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