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천막집회의 현장을 가다(3) 안동집회

기성교회 본고장 강타한 안동집회... 그날의 백사장엔 낯선 찻길만
발행일 발행호수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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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①`저기 저 철길을 보면 천막이 쳐져있었던 곳이 이쯤` 이라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안동집회 참가자인 이순복권사(왼쪽)과 권선옥권사(오른쪽). ②안동역 풍경. ③낙동강변의 백사장 – 낙동강변에 조성된 체육공원 옆에 땅을 돋워 왕복 6차선 차로가놓이고 그 옆으로 안동 청소년 수련관과 안동체육관 등의 시설을 세웠다. 위의 사진에 서있는 자리는 청소년 수련관 앞 놀이터에서 철교를 등지고 서있는 것이다.

“영등포백사장집회에는 처음으로 마련된 조립식 천막으로 약 500평의 거대한 가건물이 형성되었는데 남산에 못지않은 은혜가 나려, 특기할 것은 일조(一朝)에 벙어리 10명이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집회가 끝난 후에 영등포 각 교회는 작은데가 2-30명 많은데는 5-60명이 증가되었다.
 
세번째 가진 안동집회는 초하(初夏)를 재촉하는 때이라 낮에는 뜨거워 설 수 없는 낙동강변 백사장에 위치하였다” 신앙신보는 1956년 5월 21일자 협회 창립 1주년기사에 지난 1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며 안동집회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55년 불같이 일었던 천막집회. 그 세번째 집회는 안동에서 있었다. 초여름 날씨인 5월 17일 집회가 열렸던 안동의 낙동강변 백사장 그 자리를 찾았다.
 
낙동강변 백사장은 많이 변해있었다. 비만 많이 오면 범람을 하던 낙동강 상류에 안동댐(1977년 준공)을 쌓아 유속을 조절할 수 있게 되자 백사장을 매립한 것이다. 예전의 그 넓디넓은 백사장은  강쪽에서부터 일부는 체육공원이 되고, 일부는 왕복 6차선 도로가 되고, 일부는 터를 다져 실내 체육관을 비롯해 청소년 수련관 등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니 그 옛날 낙동강변 백사장이 얼마나 넓었을지 가늠이 된다.
 
1955년 남산집회에 이어 영등포집회를 하고 이어 세번째로 집회가 있었던 곳은 경상북도 안동이다. 안동이란 도시가 주는 유교적 이미지는 강하다.
 
그러나 안동은 그런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나라 근대화 초기에 서양의 선교사들이 일찍이 들어와 포교하기가 좋은 조건이 되었다. 다시말해 조선이 일제에 의해 병탄이 되자 불사이군의 정신을 지키던 유림들이 이제는 일왕에 대해 충성을 해야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 안동사람의 정서에 맞지 않았던 일, 그렇게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오니 기본적으로 하늘을 두렵게 섬기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신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에는 역사가 오래된 큰 교회당들이 있다.
 
안동은 1963년에야 시로 승격이 되니 1955년 천막집회가 열렸던 당시에는 아직 안동읍이었다. 일개 읍임에도 하나님의 천막집회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시 안동에서 큰 세를 확보한 장로교계 교회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안동집회 참석자 대부분은 교회에서 목사들의 권면받고 나온 기성교인들
목사들은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기뻐서 단상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안동집회 참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석자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니고 있던 사람들이고, 또 교회에서 광고를 해서 참석하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순복(63세.안동교회)권사는 당시에 다니던 안동서부교회 목사가 하나님의 천막집회에 갈 것을 권유해서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태선장로님이라는 은혜도 많고, 좋은 분이 온다’고 하며 서부교회 목사가 같이 가자고 해서 서부교회 사람들은 다 갔어요. 그 때 교회에서 반사일을 했었는데 내가 체증으로 엄청 고생을 하고 있었어요.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니고 서울대학 병원에까지 갔는데도 못고치고 죽는다고 했었어요. 오죽했으면 우리 오빠가 돈을 자루로 주며 먹고 싶은 거 다 먹으라고 했었을까요.” 그러나 집회에 참석한 후 하나님께 안수를 받는 순간 그토록 고생하던 체증이 나았다고 했다. “안수를 받는 순간 트름이 나며 명치 끝에 뭔가 걸린 것 같던게 툭 떨어지는 느낌이 나면서 그길로 나았어요.” 옆에서는 앉은뱅이가 손에 끼고 왔던 게다(왜나막신)를 벗어버리고 일어나는 등 병 나은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고 했다.
 
당시에 당북동에서 살았던 권선옥(70세.안동교회)권사는 “시집오기 전에는 안동교회를 다녔는데 시집와 보니 시댁어른들이 안동서부교회를 다녀 안동서부교회에 함께 다니게 되었어요. 저도 교회에서 광고를 듣고 집회에 참석했는데, 안동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권권사는 당시에 낮집회에 참석하여 안수를 받고 저녁이면 집에 가서 저녁식사를 차려주고 또 식구들과 같이 저녁집회에 참석하곤 했었다고 한다. 권권사는 그 때를 회상하며 “마음에 감동이 있어요. 기쁨이 막 몰려오는데, 그 전에 교회에 다니면서 느껴보지 못했던 기쁨이었어요. 입에서는 찬송이 끊이질 않았어요. 설거지를 해도 찬송, 빨래를 해도 찬송…” 지금 생각해도 감회가 새로운지 권권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때 하나님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민경순(80세.기장교회)권사는 “그 때 목사들이 은혜 받고 기뻐서 단상에서 춤을 추기도 했어요.” 또 김복순(87세.서울동작교회)권사에게는 “나는 집에서 밥을 해서 날라다 줘서 먹었지만 안동 인근 촌에서 온 사람들은 뭐 사먹기도 힘드니까 강변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으며 집회에 참석했어요.”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50년전 일이다.
 
그 때의 정황을 신앙신보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 두번 집회에 참석했든 자들의 소식을 들은 이들은 반신반의요, 은혜의 체험이 많은 이들과 불신자들의 관심꺼리가 되었다. 일부교회에서는 신도들의 절대불참을 권했었다.
 
제3일 아침에 권능은 나타났으니 60되는 전신불수 벙어리 여노인이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감격의 환호를 연발하며 시민들은 몰려들었다. 확실한 증거를 목격한 저들은 의혹을 버리고 갈구의 태도로 나왔다. 치병자(治病者)도 다수였다. 안동시민들에게 일대충격이었다. 안동역을 출발하는 남북행 열차에는 집회 참석자로 만원이고 찬송과 환호는 출정시(出征時)를 방불케하였다.”
송혜영기자news-song@the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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