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이 곱게 핀 모습을 보고 유족들이 놀라워 해

김복동 집사(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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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지난호에 이어서>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는 직원들이 저를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제 곧 본인들이 감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교회 목사가 전도관으로 몰려가는 직원들을 두고볼 수 없어서 피복창 책임자에게 감원을 부추긴 것 같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70여 명이 전부 감원된 뒤에도 다른 직장을 구해 일하면서 부산전도관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당시 부산제단에 다니던 송 권사님은 본인 집의 방 몇 칸을 깨끗이 단장해 예배드릴 공간을 마련했고, 광안리 지역에 사는 교인들은 매일 그곳에 모여서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집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을 때는 인근의 장로교회, 성결교회, 감리교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하려고 몰려와 집 근처의 도로까지 빼곡하게 늘어섰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기에 턱없이 작고 부족한 곳이었지만 그런 곳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친히 오셨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입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신동제단에 모여들면서 영주동에 큰 전도관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산 시가지와 시원한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웅장한 제단을 짓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일하는 사람들 식사를 준비하는 일에 참여했는데, 일을 하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였으며, 하나님께서 건설 현장에 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먹을 음식에 축복을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신동제단에 몇 번 나왔던 20대 청년이 폐병을 앓다 숨을 거두었는데, 고인의 간곡한 뜻에 따라 전도관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생전에 낯빛이 창백한 데다 빼빼 말랐던 고인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짙었으며 숨을 거둔 후에는 장작개비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명물을 시신에게 먹이고 깨끗이 씻긴 후 보았을 때는 달덩이처럼 뽀얗게 핀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작개비같이 굳었던 몸이 팔다리, 머리 할 것 없이 노글노글 부드럽게 되어 손발을 잡고 움직이면 자유자재로 움직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유족들도 시신이 곱게 핀 모습을 보고 놀라워하면서 앞으로 전도관에 다니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시신을 모신 방에 계속해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서, 저는 ‘바람이 들어올 데가 없는데 어디서 이렇게 바람이 부나?’ 하고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바람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시신을 모신 관에서 계속 불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성신의 바람으로 시신을 지켜 주신다.”며 다른 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뽀얗게 핀 고인의 모습을 다시금 바라봤습니다. 예배에 몇 번 나오지도 못하고 숨을 거둔 고인은 교인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래도 잊지 않으시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그 은혜에 무슨 말로 감사를 다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주동제단이 거의 완공되어 가던 1957년 10월, 서울 이만제단에서 대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집회 기간 중에는 제3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가 열려서 축구, 농구, 배구, 100m 달리기, 릴레이, 마라톤 등 다양한 종목에서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열전을 벌였습니다. 서울 운동장(現 동대문 운동장) 응원석을 가득 메운 교인들이 다 함께 깃발을 흔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신나고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부산 팀 소속이었던 제가 릴레이 주자로 운동장을 힘차게 달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열심을 다해 기량을 겨루는 선수들과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새하얀 운동복 차림으로 함께 달리시던 하나님……. 생각할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저의 소중한 추억입니다.
1957년 11월 저는 경기도에 소사신앙촌을 건설하신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건설대에 지원했으며, 얼마 후에는 전쟁 통에 헤어졌던 아들을 친척 집에 수소문하여 찾게 되었습니다. 건설대 운반반에 소속된 저는 재목과 모래 같은 건설 자재를 나르며 훌훌 날아가는 듯 빠른 걸음으로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를 오르내렸습니다. 건설대원들은 A반과 B반으로 나누어 주택과 공장, 오만제단을 건설하면서 서로 힘든 일을 하려고 경쟁하기가 다반사였으며 더 무거운 일을 하려고 지게나 물초롱을 숨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건설대원들과 함께 “감람나무 별 나타났네~” 하는 찬송을 만들어 부르곤 했었는데, 지금도 그 찬송을 흥얼거리면 즐거웠던 시절이 생각나곤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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