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18> 그들이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무엇인가?
세계 종교 탐구 <18>1901년, 고대 엘람 왕국(現이란)의 수도 수사에서 2미터가 넘는 커다란 돌비석이 발굴되었다. 엘람 왕국의 유물인 줄 알았던 이 비석은 바빌로니아(現이라크)의 함무라비 법전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으로 유명한 함무라비법은 서기전 176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의 제6대 왕인 함무라비가 세운 법으로, 모든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거대한 비석에 새겨져 바빌론의 한 신전에 세워졌다. 그는 법의 서문에서 이 법이 신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임을 밝혔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자라도 이를 알 수 있도록 비석 상단에 법을 하사받는 자신의 모습을 부조로 새겨넣었다.<자료1> 신과 왕, 그리고 법이라는 신성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이 비석은 바빌론의 대단한 성물이고 문화재였다.
그러나 6백 년 후인 서기전 1158년, 엘람 왕국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이 비석을 약탈해갔다. 엘람의 왕은 비문의 일부를 지우고 자신의 승전 사실을 새겨 넣었고, 전승 기념비로서 엘람의 신전에 전시하였다. 이번뿐만 아니라 당시 엘람 왕국은 바빌로니아를 수시로 침략하여 문화재를 조직적으로 약탈해 갔고, 엘람의 왕궁에는 약탈해 온 바빌로니아 문화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물품들은 금이나 은에 비해 물적, 경제적 가치는 없을지라도 상징적 가치가 있었다. 승전의 증거였으며, 자신들이 바빌로니아 문명의 소유자이며 계승자라는 증거였던 것이다. 반대로 바빌로니아가 약탈당한 것은 단순히 물적인 가치가 아닌 그들의 문명과 역사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나라가 정복되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신전과 신상, 도서관과 점토판(현재의 책) 등이 약탈되거나 파괴되었다. 『이쉬비에라(서기전 2000년경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신 왕조의 초대왕)에 대한 찬가』라는 점토판에 그 목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국가와 도시를 파괴하라는 엔릴(수메르에서 지상의 최고신)의 명령에 관해 살펴보자면 (…) 그 문화를 말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고대사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시 약탈과 파괴는 마치 인류의 한 관행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주체의 상당수가 ‘종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약탈하고 파괴한 것이 비단 물적인 가치에 한하는 것일까?
이번『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종교가 벌인 약탈과 파괴 행위에 대해 알아본다.
▣ 예루살렘 성전 종교물의 약탈 및 파괴
서기 70년 9월 7일,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은 유대인들의 도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다. 로마 제국이 황제 숭배를 강요하자 야훼를 숭배하는 유대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무력 항쟁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린 로마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또 유대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도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했다. 현재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에는 로마군이 제사상, 촛대, 나팔 등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용품을 약탈해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자료2> 유대인들은 반란 실패의 결과로 자신의 국가와 성전을 잃어버리고 중동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455년 6월 2일, 가톨릭 국가 로마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족에 점령당한다. 이때 반달족이 로마가 예루살렘에서 약탈했던 유물들을 약탈해 갔다고 한다. 그러나 반달 왕국은 534년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되었고 그 유물들은 현재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보관돼 있다. 이 지하 묘지는 가톨릭에서 초대 교황 베드로가 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곳으로, 교황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려는 가톨릭 전통에 따라 역대 교황들이 온몸의 혈액과 가스를 제거하고 화학약품을 넣는 방부 처리가 되어 묻혀 있는 공동묘지이다.<자료3>
지난 4월 29일, 이스라엘의 랍비 제머 토브는 이스라엘의 주요 일간지 이스라엘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70년 이스라엘에서 약탈한 유물들이 바티칸 지하 묘지에 있다는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으며, 랍비 보코브자가 겪은 실화를 얘기했다.<자료4>
“1929년 랍비 보코브자는 이탈리아 왕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는 왕의 요청에 “약탈당한 예루살렘 성전의 유물을 보고싶다.”고 한다. 그는 왕의 도움으로 바티칸의 깊숙한 지하 묘지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하에 내려간 그는 동반한 경비병이 베일을 벗기려 할 때 “충분히 봤다”며 멈추라고 요청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고, 그 후 침묵하겠다는 맹세를 한 뒤, 한 달 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그는 이스라엘 당국이 나치에게서 약탈당한 유대인의 물품은 돌려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바티칸에는 요구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인터뷰는 유대교에서 생각하는 예루살렘 유물의 가치를 알 수 있게 해준다.
▣ 이교도 종교물의 약탈 및 파괴
종교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반하는 철학이나 이교를 탄압해 왔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을 부정하는 철학자나 유대인의 율법책을 불태웠으며, 1193년 이슬람은 힌두교 및 불교 지식의 보고였던 인도 날란다 사원의 도서관을 불태웠고, 12~13세기 몰디브와 인도 갠지스 평원 지역에서 수백 개의 불교 사원과 사당을 파괴하고, 불교 경전을 불태웠다. 그리스도교에서 공식적이며 본격적으로 이교의 신전과 신상, 도서관과 서적을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391년,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면서부터다.
당대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자 지식의 보고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이때 방화당했다.<자료5> 《사라진 도서관》의 저자 루치아노 칸포라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중요 건물인 세라피스 신전도 이교라는 이유로 불살라졌고, 이때 약 20만 부의 귀중한 두루마리 책이 타버렸다.”고 했으며 “분서는 기독교화 과정의 일부”라고 단언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비롯해 당시 성행했던 이교들의 사원과 서적, 또 그리스도교에 반하는 문서들을 파괴한 결과, “4세기 로마에서 책이 거의 사라졌다.”고 평가될 정도로 많은 책들이 소실되었다.
중세에는 원주민 대륙에 찾아가 그곳의 신상과 책들을 약탈하고 불살랐다. 스페인의 후안 데 수마라가 신부는 멕시코에 가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임무를 맡는다. 고대 멕시코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는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아즈텍과 마야의 눈부신 문화와 훌륭한 문학 때문이었다. 그들은 독특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으며, 왕궁에는 거대한 도서관을 두었다. 그러나 수마라가는 이 땅이 미신적인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했고, 1530년 그는 수거 가능한 마야의 모든 저술과 신상을 약탈하여 모조리 화형시켜 버린다. 프란치스코파 소속의 디에고 데 란다 주교도 신상 5000개와 함께 마야의 책들을 전부 유카탄 반도의 ‘마니’라는 도시로 가져다가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린 뒤 불태웠다.<자료6>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의학, 천문, 신앙, 문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자산일 수도 있었을 수세기에 걸친 원주민들의 지혜가 검은 연기 속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란다 주교는 자서전에 “그 책들은 거의 악마에 관한 미신과 날조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심지어 수마라가 신부는 가톨릭 당국의 노력으로 ‘멕시코에 인쇄술을 처음 도입하고, 최초로 공공도서관을 설립한 위인’으로 탈바꿈되었다. 이렇게 원주민들의 찬란했던 정신과 기록들은 사라지고, 그들에게 이교도였던 가톨릭 문화가 원주민들의 터전에 자리잡게 되었다.
▣ 반(反)그리스도교 학문의 탄압
그들이 이교의 서적이나 종교물만 약탈하고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반그리스도교적이라 판단되는 모든 학문과 문학작품을 금지하여 세상에서 학문을 약탈해갔다. 그 방법은 출판 검열과 강제적인 금서(禁書)의 형태로 행해졌다.
1475년, 독일 쾰른 대학은 로마 가톨릭 교황에게서 인쇄소, 출판사, 심지어 독자까지 검열하는 허가를 얻었고, 주교들도 똑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1501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인테르 물티플리케스(Inter Multiplices)」라는 교서를 내려 교회의 승인이 없으면 독일에서 어떤 책도 인쇄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1515년에는 라테란 공의회에서 그 권력을 그리스도교권 전역으로 확대하여, 교황청의 이단심문소와 종교재판소가 관장하게 되었다. 16세기에는 금지서적이 크게 늘어 아예「금서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을 작성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야 했다.<자료7,8> 가톨릭교회 전체의 첫 금서목록은 1559년 교황 바오로 4세가 반포했다. 그들이 반그리스도교 서적으로서 금지한 책들은 주로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 철학, 과학에 관한 것이었다.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은 금서 목록이 생기기 이전부터 금지되어 왔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인정했고, 사제들은 일반 시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설교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오직 사제만이 할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성경을 소유하는 것조차 죄가 되었다. 이렇듯 교회는 일반 사람들이 성경을 보게 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금지하며 경계했는데, 그것은 평신도가 스스로 그동안 숨겨져왔던 성경의 모순점들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의 경전은 스스로 그들의 종교에 반하는 서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과 과학은 왜 반그리스도교 서적으로 지목되었을까?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의 기록은 신성불가침한 사실이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학문은 비기독교적인 것이었고,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이후, 더 정확히는 2세기 초부터 비기독교적인 것은 총체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비기독교적인 것은 거짓 신과 관련된 것이고, 마법이고, 잘못된 것이었다. 유클리드의 수학, 아르키메데스의 물리학, 에라토스테네스의 지리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 지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천문학, 히포크라테스의 의학 모두가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중세 의학에서는 과학적 방식 대신 성경에서 선보인 주술과 기적을 채택했다. 신성한 샘물과 성소가 치료법으로 각광을 받았고, 전염병은 ‘신이 보낸 징벌’로 간주되었다. 서기전 5세기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간질을 자연적 질병으로 보았지만, 1900년이 지난 14세기, 그리스도교를 믿던 잉글랜드의 의사는 간질 환자에게 복음을 읽어주고 흰 개의 털을 뿌리면 치료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바울의 열렬한 제자였던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정리했다.<자료9>
“생각의 흐름을 억제하고, 마음에서 세속적 학문을 비우고, 마음을 깨끗이 한 뒤 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
4세기 최초로 이단 목록을 작성했던 가톨릭의 성인 필라스트리우스도 “경험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이단”이라고 보았다.
학문에 대한 혐오는 계속 되어 529년,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철학적 사색이 이단에게만 도움이 될 뿐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는 오히려 논쟁만 가열시킨다고 보아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닫았다. 일부 그리스도교권에서는 “책이 의심의 근원”이라고 여기기도 하고, 13세기경에는 인문학 연구를 하는 학교가 많은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유해한 학문의 온상이라 비방하며, “성서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읽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널리 퍼져 13세기 초 아리스토텔레스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201년 파리에서 열린 지역 종교회의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를 전부 중단하라고 명했고, 1231년 자국어로 과학적 주제들을 토론하는것도 죄로 규정되었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은 1000여년간 학문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다.
중세 시대, 반그리스도교적 이론을 주장한 과학자 중에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1543년《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한다. 그는 태양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는 태양중심설, 즉 지동설을 주장하였다.<자료10> 태양중심설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종교 재판에 회부될 수 있었고, 그 스스로도 책의 앞날이 험난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적 증거들이 명백했기에 그는 출판을 결심한다. 그는 출판 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편지를 썼는데,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론에 대한 그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제 이론이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괴이한 것으로 보여 논쟁이 커지겠지만, 책이 출판되어 그 안에 담긴 가장 명백한 증거들이 불합리의 안개를 몰아내면 그만큼 감탄과 감사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심한 수다쟁이들이 수학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성서의 구절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할 경우, 저는 그들의 말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 불합리한 주장을 비웃을 겁니다.”
그러나 1616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비롯해 지동설을 주창하는 모든 문헌은 금서 목록에 올랐으며, 가톨릭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르치지도, 읽지도 말라고 명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지동설의 숱한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고, 갈릴레오 이후에도 계속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의심하려면 의도적으로 증거를 왜곡해야만 했다. 1822년까지도 지동설을 다룬 책의 인쇄를 허용하지 않았던 가톨릭이었지만, 망각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 앞에 현재는 지동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국내 한 추리 소설에서, 범죄 후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범죄자의 심리를 묘사하며 이렇게 말한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 ”
의도적인 사실의 망각, 진실의 망각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불합리의 안개를 몰아내면 자신의 이론의 진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던 코페르니쿠스의 말을 빌리자면, 망각의 안개를 걷어내고 나면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불변의 진리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진실을 외치고 가톨릭 금서 목록에 오르다
■ 에밀 졸라, 진실을 외치다.
1898년 1월 13일 <로로르>지 1면에는 프랑스의 작가 에밀 졸라가 투고한 격문 ‘나는 고발한다!’가 발표된다. 에밀 졸라는 이 격문을 통해 독일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됐던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임을 격정적으로 밝혔다. 이를 실은 <로로르>지는 몇 시간 만에 30만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많은 예술가, 과학자, 교수들이 일명 ‘드레퓌스 사건’ 재심 청원서에 서명했고,드레퓌스 재심 운동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드레퓌스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진범과 반대파가 함께 날조했다 들통났던 것 외에는 처음에도, 재심 때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드레퓌스는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난다.
■ 금서 목록에 오르고 의문의 죽음을 맞다.
글이 발표된 후, 에밀 졸라는 반대파들에게 살해 위협에 시달리고, 집은 경매에 붙여지고, 벌금이 물려지고, 명예훼손 소송에 시달리며 결국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며 끝없이 반유태주의를 퍼뜨리던 로마 가톨릭교회는 에밀 졸라의 모든 작품들을 자신들의 금서 목록(Index Librorum Prohibitorum)에 올렸다.
1898년 6월, 드레퓌스의 재심 진행이 결정되자 에밀 졸라는 망명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한 예수회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을 피력해왔다. 그러던 1902년, 에밀 졸라는 방에 피워둔 난로 가스에 중독되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훗날 암살자가 붙잡혔는데 그는 굴뚝 청소부였고 누군가의 지시로 굴뚝을 막아 놓았다고 자백해, 가톨릭 예수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불거졌다.
가톨릭 교회와 군부의 괴롭힘은 드레퓌스의 무죄가 밝혀진 후에도 계속 됐었고, 졸라는 생전에 이렇게 한탄했다.
“진실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늪지대를 지나가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