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 탐구 <6> 노아 홍수 이야기의 뿌리를 찾아서(下)

발행일 발행호수 2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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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노아의 홍수를 주제로 한 회화 이탈리아 밀라노 산 마우리지오 성당 벽에 그려진 ‘노아의 방주’ (출처: https://www.lebnewsonline.com/67152/)

전 지구를 뒤덮는 거대한 홍수, 망망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생명의 방주, 거기서 날려 보낸 비둘기 한 마리…….

기독교 성경에 기록된 노아 홍수 이야기는 국가와 종교,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수백 년 전부터 화가들은 홍수에 휩싸인 사람들의 모습이나 방주 속으로 들어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회화 작품으로 남겼고, 지금도 어린이 만화부터 블록버스터 영화까지 만들어지며 세계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자료1,2>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노아 홍수 이야기의 뿌리를 탐구하면서 고대인들이 남긴 기록을 발굴하고 해독했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그것은 흙더미에 묻혀 있던 고대 문자를 찾아가는 여행이자 성경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여정이었다.

<자료2> 노아의 홍수를 주제로 한 영화 토비 젠켈 감독의 애니메이션 2015년作 <노아의 방주:남겨진 녀석들>과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영화 2014년作 <노아>의 포스터 (출처: 다음 영화)


<자료3> 피에트로 델라 발레(1586~1652)
1621년, 기독교 신자이자 스스로 ‘순례자(pellegrino)’라 칭했던 이탈리아 귀족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성경 속의 성지와 중동 지방을 여행하는 중 신기한 기호를 발견했고, 이 기호에 대해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출처:https://archive.org/details/travelsofpietrod
00dell/page/n11/mode/2up)

지금부터 400년 전인 1621년, 이탈리아 귀족 피에트로 델라 발레<자료3>는 메소포타미아(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 현재 이라크와 주변국 일부에 해당함) 지역을 여행하며 신기한 기호를 보게 되었다. 오랜 세월 황폐해진 이 지역에는 무너진 돌탑이나 성벽, 계단의 벽돌에 뾰족한 쐐기 모양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은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는 아브라함이 태어난 곳이자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의 무대가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이 문자는 성경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신비로워 보였다. 이 문자에 주목한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문자 5개를 모사한 후 이탈리아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피에트로는 편지에서 “이것을 오른쪽부터 읽어야 할까, 왼쪽부터 읽어야 할까?” 하고 물으며 관심을 보였는데, 그가 쓴 편지와 메소포타미아 여행기가 책으로 묶여 나오면서 이 문자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자료4,5>

<자료4> 왼쪽 문서는 피에트로가 모사한 5개의 문자
1621년 10월 21일 피에트로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자신이 발견한 기호를 문자로 추정하며 ‘이것을 오른쪽부터 읽어야 할지, 왼쪽부터 읽어야 할지’ 물어보는 내용이 있다. (출처: Pietro Della Valle, Viaggi di Pietro Della Valle il pellegrino ; La Persia Parte Seconda, presso Paolo Baglioni, 1667, p.340)
<자료5> 오른쪽 책은 피에트로가 저술한 여행기
1660년대 presso Paolo Baglioni에서 출판된『순례자 피에트로 델라 발레의 여행기』와 페르시아편 속표지. 이 책의 출간으로 델라 발레가 모사한 쐐기 문자가 유럽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https://inlibris.com/item/bn44606/)

그 후로도 메소포타미아 곳곳에 흩어진 쐐기 문자와 유적, 유물은 유럽인들의 큰 관심을 받았는데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베히스툰 산(현재 이란 케르만샤 주 소재)이었다. 베히스툰은 험준한 돌산의 경사면에 도드라지게 조각된 부조와 방대한 양의 쐐기 문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자료6,7>

부조는 위풍당당한 남자와 그 주변에 열두 명의 남자가 있는 모습이었는데 유럽인들은 이들이 예수와 열두 제자일 것이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부조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쐐기 문자를 해독해야 했지만 지상 70m의 돌산에 새겨진 문자는 해독은커녕 베껴 쓰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난공불락의 문자를 공략한 사람이 있었다.

1835년 헨리 크레스윅 롤린슨(1810~1895)이라는 영국의 젊은 장교<자료6>는 산 위에서 밧줄을 내린 후 그 밧줄에 매달린 채로 비문 위를 천천히 이동하면서 미지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옮겨 적었다.<자료7> 그는 수년에 걸쳐 문자를 모사했을 뿐 아니라 20년이 넘는 끈질긴 노력 끝에 비문을 해독하게 되었다. 비문이 해독되면서 함께 새겨진 부조의 정체도 밝혀졌는데, 그들은 예수와 열두 제자가 아니라 다리우스 왕과 신하, 그리고 다리우스가 정복한 다른 나라의 왕이었다.

<자료6> 헨리 롤린슨(1810~1895) 롤린슨은 베히스툰 비문을 해독함으로써 ‘아시리아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출처: 영국 국립 초상화 갤러리)
<자료7> 롤린슨이 옮겨 적은 쐐기 문자  위에 사진은 베히스툰 비문의 일부이며(부조 아래 3번째열 비문 54~61행 좌측)이며, 아랫쪽 그림은 이를 옮겨적은 롤린슨의 기록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하게 모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 H.C RAWLINSON, The Persian cuneiform inscription at Behistun, John W. Parker, Londres, 1846, Behistun Inscription ColumnⅢ)

롤린슨이 해독한 첫 문장은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다리우스, 위대한 왕, 왕 중의 왕, 페르시아의 왕이다.”

그는 해독할 때 발음을 아는 기호가 ‘다’밖에 없었지만 ‘다’로 시작하는 왕의 이름인 ‘다리우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롤린슨이 다리우스를 알았던 것은 성경에 다리우스가 페르시아 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다리우스 왕과 페르시아에 대한 정보는 성경에 크게 의존했는데 그때까지 성경 외에 그 시대(서기전 550년~350년)의 정보를 알려줄 만한 책이 손에 꼽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헨리 롤린슨이 쐐기 문자 해독을 끝낸 1857년은 ‘아시리아학’이 탄생한 해였다. 아시리아학은 메소포타미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쐐기 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면서 성립한 학문이었다. 또 이 무렵부터 영국과 독일 등 기독교 국가들을 중심으로 ‘성서고고학’도 발달하게 되었다.

성서고고학은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하는 학문으로, 기독교 국가들은 성경의 무대가 되는 메소포타미아를 발굴하고 연구하면서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롤린슨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와 천재들이 지극히 어려운 쐐기 문자 해독에 수십 년간 열정을 쏟아 부은 것도, 기독교 국가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아시리아학과 성서고고학을 발전시킨 것도 모두 성경의 이야기를 증명한다는 종교적 열망이 큰 이유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쐐기 문자 해독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베히스툰 비문이 모두 해독되고 나자 비문이 성경에 없는 풍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다리우스 왕의 이야기는 그에게 지배당하던 유대인 입장에서 서술된 데 반해, 베히스툰 비문은 다리우스 자신이 당시의 정치 상황을 자세히 서술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성경의 내용을 사실로 증명하기 위해 시작된 발굴과 문자 해독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롤린슨이 저술한『베히스툰의 페르시아 설형문자 비문』(1846년)
롤린슨은 베히스툰 부조와 비문을 모사한 내용과 더불어 고대 페르시아어 해독 내용을 담아 책으로 출간했다. (출처:https://www.meretsegerbooks.com/pages/books/M4166/rawlinson-henry-creswicke/the-persian-cuneiform-inscription-at-behistun)

– 다음은 롤린슨이 저술한 『베히스툰의 페르시아 설형문자 비문』(1846년) 내용의 일부입니다.
첫 번째 그림 <베히스툰 비문의 로마자 번역 및 발음>, 두 번째 그림 <문자의 해독 과정>, 세번째 그림 <페르시아어 첫 번째 비문 모사>

왼쪽은 베히스툰 부조와 비문의 모습
베히스툰 비문은 다리우스 왕이 다른 나라의 왕들을 제압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비문과 함께 조각된 부조는 다른 나라의 왕들을 근엄하게 내려다보는 다리우스의 모습이며 그 위에는 페르시아에서 최고의 신으로 숭배하던 아후라 마즈다가 공중에 떠서 다리우스를 강복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출처: https://www.irantourtravel.com/2017/05/los-mejores-sitios-que-ver-en-kermanshah.html)
오른쪽은 베히스툰 부조와 비문을 모사한 롤린슨의 그림
베히스툰 비문은 지상에서 70m 높이의 경사면에 있었을 뿐 아니라 비문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비문 아래 산중턱이 제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상에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에 도전한 H.C.롤린슨은 산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왼손에는 노트를, 오른손에는 펜을 들고 조각과 쐐기 문자를 하나하나 모사했다. (출처: H.C RAWLINSON, The Persian cuneiform inscription at Behistun, John W. Parker, Londres, 1846)

베히스툰의 쐐기 문자가 해독되고 15년이 지난 1872년, 쐐기 문자로 쓰인 서사시가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 그것은 ‘길가메시 서사시’였다. 거기에는 노아 홍수와 너무나 흡사한 대홍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유럽인들은 당연히 성경의 이야기가 고대 문자로 기록된 것이라 여기고 흥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발굴과 연구가 계속되면서 기독교 국가들의 흥분은 당혹으로 바뀌게 되었다.

1800년대 후반 들어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의 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쐐기 문자가 적힌 점토판과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악카드어’로 쓰인 쐐기 문자가 가장 오래된 문자인 줄 알았는데, 악카드어보다 더 복잡하고 오래된 고대의 문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1928년 우르크에서 발굴된 점토판에 이 문자가 기록돼 있었는데 연구 결과 이 언어는 ‘수메르어’이며 이 점토판에 새겨진 쐐기 문자는 인류 최초의 문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유물의 연대를 측정하는 데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이라는 과학적인 방법을 활용하게 되었는데, 이 방법을 이용해 측정한 점토판의 제작 연대는 서기전 3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 점토판은 일종의 회계 장부로 여러 물건의 수치를 기록한 것이었다.<자료8>

<자료8> 최초의 문자로 적힌 점토판과 발굴지 우르크
1928년 우르크에서 발굴된 수메르어 점토판. 제작 연대는 서기전 3300년으로 인류가 기록한 최초의 문자이다.
(출처: https://www.sciencephoto.com/media/185171/view, EBS 다큐멘터리 <문자> 1부 위대한 탄생에서 캡처 )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수메르어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 점토판이 발견된 것이었다. 그때까지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악카드어로 기록된 것이었지만 발굴 작업이 계속되면서 더욱 오래된 문자인 수메르어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젊은 왕이었던 길가메시는 서기전 2600년대 수메르(고대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을 일컫는 말)의 문명 국가인 ‘우르크’를 통치했다. 그가 겪은 흥미진진한 모험담인 길가메시 서사시는 수메르 전역의 학교에서 전승되었으며 수많은 필경사들이 점토판의 기록으로 남겼다. 지금까지 발굴된 점토판 중에 가장 오래된 길가메시 서사시는 서기전 2100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에 비해 성경은 서기전 400년대에 기록되었으므로 길가메시 서사시에 포함된 대홍수 이야기는 노아 홍수 이야기보다 1700년 앞선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를 연구하는 ‘아시리아 학자’인 장 보테로는 성경과 동일한 이야기가 성경보다 앞서서 기록된 것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것은 성경이 ‘최초의 서적이며 가장 오래된 서적’이라는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생각과 성경의 성스러운 권위를 뒤엎는 사건이었다. 결국 성경은 역사의 기다란 사슬 안에서 그저 하나의 고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장 보테로,『메소포타미아–사장된 설형 문자의 비밀』, ㈜시공사, 2008., p.48)

장 보테로의 지적대로, 성경이 최초의 기록이 아니고 과거 역사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성경이 최초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그것이 신의 계시를 받은 유일무이한 기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성경이 과거 역사에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록을 계승한 것이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중대한 문제였다. 기독교에서 성경은 신의 계시이며 그 계시에 따라 예수가 구세주라고 기록되었다고 믿는데, 만약 성경이 신의 계시가 아니라면 예수의 신성마저 무너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아시리아 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델리취 교수가 “성경은 더 이상 유일한 신의 계시로 간주될 수 없다.”고 했을 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라며 극렬하게 반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독일 주간지 <그렌츠보텐>, 라이프치히 출판사, vol.62 1903년 1분기,p.493)

이 같은 논쟁이 치열했던 시기는 1900년대 초반으로, 그보다 수십 년 전에 델리취 교수와 같은 생각을 가진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이었다. 1880년 11월 24일 다윈이 작성한 편지를 보면 “나는 성경을 신의 계시라 믿지 않으며 그에 따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지 않는다.(I am sorry to have to inform you that I do not believe in the Bible as a divine revelation & therefore not in Jesus Christ as the son of God.)”고 적혀 있다.<자료9> 이 편지는 다윈의 뜻에 따라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그의 사후 135년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 평생 동안 증거를 통해 과학적인 사실을 밝히고자 했던 다윈은 특정 종교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자료9>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의 편지. (왼쪽은 편지의 타이핑본-필기체로 쓴 편지의 내용을 타이핑한 것. 오른쪽은 원본)
다윈은 ‘성경을 믿느냐’는 독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신하였으며 이를 비밀
에 부쳐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성경을 신의 계시라 믿지 않으며 그에 따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지 않는다.”
(출처: https://metro.co.uk/2015/09/22/letter-in-which-charles-darwin-admits-to-being-an-atheist-sells-for-125000-5402164/)
오른쪽 인물은 찰스 다윈(1809~1882)

델리취와 다윈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1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증거에 입각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어떤 수의(壽衣)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통해 서기후 1300년에 제작된 사실이 증명됐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기후 30년에 그 수의로 예수의 시체를 감쌌다고 믿는 것을 보면 사실이 사실의 지위를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다음 번 <세계 종교 탐구>에서는 고대의 기록을 통해 성경 창세기의 뿌리를 찾아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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