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성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하루하루 맑게 살아가고파

손정숙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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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당시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많은 교인들이 입주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동창이 소사신앙촌에 있어서 주말이면 친구를 만나러 갔습니다. 신앙촌 포도밭에서 재배한 포도가 아주 달고 맛있어서 친구와 실컷 먹었던 일과 주인 없는 상점에서 물건을 샀던 일이 기억에 선합니다. 주인 없는 상점에서 나간 물건과 들어온 돈을 맞춰 보면 꼭꼭 맞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깥에는 주인이 있어도 물건을 집어 가는데 역시 신앙인이 사는 곳이라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한번은 소사신앙촌 오만제단 예배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길가에 떨어진 못이라도 자기 집에 가져가 박지 마세요. 회사에서 받은 출장비가 남아 부지불식간에 1원이라도 주머니에 넣으면 도적죄가 됩니다.” 하셨습니다. 큰 것만이 죄가 아니라 양심의 법을 지켜서 작은 죄라도 멀리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오만제단 예배 때 길가에 떨어진
못이라도 가져가지 말라 하시며
양심의 법을 지켜야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마음 깊이 와 닿아

그 후 저는 이화여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수도 중고등학교에서 양호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전도관 교인이셨던 홍경섭 교장선생님은 교직원 회의에서 “양심을 지킬 때 오는 기쁨이 있다. 교사들도 언제든지 양심을 속이지 말고 일하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번은 전교생이 복용할 구충제를 구입할 때 약 판매상이 하는 말이, 양호교사가 약값을 부풀려 차익금을 갖는 일이 흔하다며 저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제 약값만큼 학교에 청구했더니 교장선생님이 왜 작년보다 약값이 줄었냐고 물으셨습니다. 판매상이 했던 말을 전하며 약값 그대로 청구했다고 말씀드리니 “그래, 전도관 교인은 다르지.” 하셨습니다.

몇 년 동안 교사 생활을 했던 저는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사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1964년 2월 7일에 출국하기로 했는데 마침 전날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분들과 함께 저희 집에 오셔서 식사 대접을 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옆에 계시던 분이 “이 집 딸이 내일 미국에 간답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하나님께서는 먼 나라에 간다 하시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다음 날 비행기에 오를 때 그 모습이 떠올라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나는 저를 지켜 주시기를 마음속으로 기도드렸습니다.

밤새 향취가 진동했던 천막집회가
잊혀지지 않아 누가 그런 은혜를
줄 수 있나 생각하니 성신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 깨달아

저는 뉴욕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간호사 면허를 딴 후에 병원에서 근무했습니다. 한국인 의사와 결혼하고 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 어머니가 보내 주시는 신앙신보와 전도관 소식이 항상 반가웠습니다. 1981년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신 뒤에는 말씀 테이프도 보내 주셔서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습니다. 초창기부터 변함없이 죄짓지 말라 하시는 말씀과 구원 얻는 길을 가르치시는 말씀이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처음 뵈었던 천막집회에서 밤새도록 향취가 진동했던 일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누가 그런 은혜를 줄 수 있을까 생각하니 성신을 주시는 분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깨달으면서 떠오르는 하나님 모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루 종일 무더기 심방을 하시고 밤늦게 돌아오시면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많은 환자들을 일일이 안찰해 주시던 모습이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은혜를 주시려고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는 생각이 들었고 구원을 주시려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1996년 추수감사절 전날에
신앙촌 하늘 가득히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을 봤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실감

저는 천부교회가 없는 오리건 주에 살다 보니 예배드리기가 여의치 않았는데, 매주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 1996년 LA교회 근처로 이사했습니다. 그때부터 절기예배가 있을 때마다 신앙촌에 갔습니다. 그해 추수감사절 전날 신앙촌 하늘 가득히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을 봤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촌에서 지내는 동안은 마음이 더할 수 없이 편안했고 미국에 돌아오면 다시 신앙촌에 갈 날을 기다리며 지냈습니다.

남편이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에게 생명물을 직접 넣어 드리게 해
하버드 의대 교수로 있는 아들은 생명물이 술술 넘어가는 것을 보며 무척 놀라워 해
입에 생명물을 넣어 주고 나니 생전의 병색이 사라지고 얼굴이 맑고 뽀얗게 피어

저희 어머니는 미국에 오셔서 저와 같이 LA교회에 다니시다가 2006년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숨을 거두신 후에 생명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계속 넣어 드렸는데 얼굴을 보니 검버섯 하나 없이 뽀얗게 피어 있었습니다. 원래 피부색은 하얀 편이시지만 검버섯이 많았는데 얼룩덜룩한 검버섯이 깨끗이 없어지고 피부는 더 환하게 피어서 그렇게 고우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듬해 골수암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임종을 지켰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죽은 사람은 물을 넘길 수 없지만 생명물은 입에 넣어 주는 대로 들어간다고 설명하고 직접 넣어 드리게 했습니다. 하버드 의대 교수로 있는 아들은 생명물을 넣어 주는 대로 술술 넘어가는 것을 보며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한참 생명물을 넣어 주고 나니 생전의 병색이 사라지고 얼굴이 맑고 뽀얗게 피었습니다. 딸이 그 모습을 보고는 아빠가 너무 예쁘고 곱다며 좋아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신앙촌이 늘 그리워
교인들과 신앙촌에 입주했을 때
내가 어떻게 이런 복을 받나 싶어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흘러내려

미국에서 생활이 안정되고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아무리 오래 살아도 미국은 타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 항상 그리는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이북도 아니고 학창 시절 추억이 있는 서울도 아니고 하나님 세워 주신 신앙촌이었습니다. 2008년 미국에 있는 교인들과 같이 신앙촌에 입주하게 됐을 때 내가 어떻게 이런 복을 받나 싶었습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이제 왔으니 내 집을 찾아 주여 나를 받으사 맞아 주소서.” 하는 찬송이 제 마음 그대로였습니다. 잠자리에 누우면 ‘내가 신앙촌에 왔구나.’ 하며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미국에 있는 동안 대학교 동창들과 연락하면서 절기예배 때는 신앙촌에서 같이 예배드리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동창들을 만났을 때 친정어머니가 생명물로 곱게 피셔서 검버섯도 사라지고 참 예쁘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하는 중에 코가 확 뚫리며 박하 향처럼 진한 향기가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환하게 트이고 말할 수 없이 시원해졌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목과 가슴이 시원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가 체험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은혜 받은 이야기를 전할 때 이렇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창들에게 친정어머니가
생명물로 곱게 피셔서 참 예뻤다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 코가 확 뚫리며
박하 향처럼 진한 향기가 맡아져

신앙촌에서 오래 지내오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제가 뵙지 못했던 하나님 모습을 많이 알게 됩니다. 건설대원으로 일하셨던 분은 신앙촌 건물 하나만 봐도 하나님께서 같이 일하시고 은혜 주시던 모습이 필름처럼 계속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지금 시계탑이 있는 1동 건물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2층 집무실 창문을 여시고 1층에 놓인 물통들을 향해 축복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함께해 주셨고 지금도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다 표현하겠습니까. 그 은혜를 간직하며 사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내 마음에 성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하루하루 맑게 살아서 하나님 계시는 아름다운 세계에 가기를 오늘도 기도드립니다.

(손정숙 권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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