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생각으로도 죄 짓지 말라’는 말씀을 생의 좌우명으로

신앙체험기 기장신앙촌 홍창홍 승사(2)
발행일 발행호수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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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신앙촌 오만제단 신축 부지에서 열린, 연인원 70만 명의 대 군중이 참석한 노구산집회.(1958.6.30.~7.5.)

그렇게 안찰을 받은 후로 저는 ‘장로님께서 나를 처음 보실 텐데 어떻게 내 죄를 아시나?’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감람나무에 대한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람나무는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분이 아니신가. 은혜를 내려서 죄를 씻어 주시는 분이 어찌 내가 지은 죄를 모르시겠나. 안찰하시며 죄를 지적하시는 것도 감람나무가 아니시면 하실 수 없겠구나.’ 그렇게 깨달아지면서 의문을 가졌던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만 보다가
너무도 아름답게 건설되는
신앙촌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무슨 일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돼

그 후로 여러 번 안찰을 받은 저는 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니 자연히 죄를 짓지 않고자 조심하게 되었으며, 죄를 짓지 말라고 안타깝게 외치시는 말씀이 절실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때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말라.’ 하시는 자유율법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작은 죄라도 짓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성신을 받아 새 마음 새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성교회를 물이 없는 목욕탕에 비유하시며 “성신이 없는 기성교회에서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기성교회 목사(牧師)들은 목사(目死)라고 하시면서, 눈이 어두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것처럼 구원을 알지 못하는 목사들이 교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기성교회에서는 전도관의 생명물을 두고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 운운하며 비방했는데, 어느 일요일 저는 하나님께서 생명물을 축복하시는 모습을 직접 뵙게 되었습니다. 이만제단 1층에서 커다란 물통을 향해 “쉭! 쉭! 쉭!” 하고 축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생명물을 마시고 열병이 나았던 저는 ‘저렇게 축복하시는구나!’ 하고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성교회에서 떠드는 비방이 참으로 악의적이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성교회는
물이 없는 목욕탕
같다고 비유하신 후
성신이 없는 기성교회에서
어떻게 죄를 씻어
구원을 얻을 수 있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처럼
목사들이 교인을
지옥으로 인도해

그 후로 학생회 일을 계속하며 축복받을 기회가 자주 있어서 저는 소사신앙촌을 여러 번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한창 건설 중인 소사신앙촌은 하루가 다르게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을 갖추어 갔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제과 공장에서 풍기는 카스텔라의 달콤한 냄새와 함께 수십 개 공장에서 힘차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택가에는 지붕에 고운 색깔을 칠한 벽돌집들이 들어섰으며 신앙촌 제품과 건설 현황을 전시한 산업관, 그리고 ‘주인 없는 상점’도 세워졌습니다.

저는 6.25 전쟁 후로 허물어진 서울의 모습만을 봐 왔기에 새롭게 건설되는 신앙촌이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당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던 우리나라에서 원조 한 푼 받지 않고 신앙촌을 자력으로 건설한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외국의 원조만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앙촌을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의지와 희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58년 여름에는 소사신앙촌의 노구산에서 대규모 부흥집회가 열렸습니다. 전국에서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습니다. 저는 집회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에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소사신앙촌으로 달려갔습니다. 집회 중 어느 날인가 저녁예배를 드릴 때는 한 줄기 뽀얀 기둥 같은 것이 하늘에서 사람들 머리 위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게 뭘까?’ 하며 의아했는데 예배를 마친 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뽀얀 것이 바로 이슬같이 내리는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엿새간의 집회 기간 동안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좋은 향취가 계속 진동하여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으며,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뒤로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억울한 옥고를 치르시게 되었습니다. 유례가 없는 대규모 부흥집회를 인도하시고 신앙촌을 건설하시며 하나님을 따르는 수가 구름 떼같이 몰려오자, 기성 종교의 교권주의자들과 일부 위정자들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음모와 계략으로 하나님께서 아무런 죄도 없이 영어의 몸이 되셨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언론에서 매일같이 전도관과 신앙촌에 대한 비방 기사를 실었던 그때, 아버님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셨으나 저는 마음속의 굳은 결심을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귀한 은혜를 받았고 참길임을 깨달았으니 세상이 무어라 한들 이 길을 따라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연탄가스에
정신을 잃은 전도사님
생명물을 조금씩
입에 넣자 ‘휴~’하고
숨을 쉬더니 눈을 뜨고
곧 건강을 회복해

그 후 저는 1963년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군생활을 하며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 크게 걱정되었는데, 다행히도 대대장의 허락을 받아 인근의 동두천전도관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고 신앙촌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부대에서 휴가를 나갈 때마다 덕소신앙촌에 가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 아름다운 신앙촌의 모습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후 1965년에 제대하여 집과 가까운 성동제단에 다녔는데, 박용한 전도사님이 부임해 오신 뒤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새벽예배 시간이 지나도록 전도사님이 제단에 나오시지 않아서 청년들 몇 명이 사택으로 가 보았습니다. 방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 보니 방 안에 연탄가스가 자욱한 채로 전도사님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뒤따라오신 권사님이 방문을 열고 빨리 밖으로 모시고 나오라고 하여 전도사님을 방 밖으로 모시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생명물을 가져와 입에 조금씩 넣어 드리자 “휴~” 하고 숨을 쉬시더니 눈을 뜨셨습니다. 춥다고 하셔서 방에 모시고 들어가 따뜻하게 해 드렸더니 전도사님은 금방 기운을 차리셨습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한 일이라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생명물을 드신 후로 전도사님은 이전과 다름없이 건강하게 생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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