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럽고 누추한 마음이 씻음 받아 눈보다 더 희게 되어야
오향근 권사(1) / 기장신앙촌저는 1935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도이리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무 가구 남짓한 집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에서 동네 어른이셨던 저희 부모님은 종종 마을 사람들의 대소사를 상의해 주곤 하셨습니다. 저희 집은 1년에 열두 번씩 제사를 지내며 교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는데, 어느 날 서울에 사는 친척 언니가 찾아와서 ‘전도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전도관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세우신 곳으로 놀라운 은혜가 내린다면서, 이번에 서울중앙전도관에서 개관집회가 열리니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몇 시간이나 계속되는 언니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작은어머니와 제 동생(현재 죽성교회 오경근 관장)은 동네 어른들과 함께 전도관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7년 4월이었습니다.
열흘동안 이만제단 개관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동생은
어찌나 기쁘고 즐거운지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며 저를 전도해
열흘 동안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동생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예배드릴 때 아주 좋은 향기가 양동이로 퍼붓는 것처럼 진동했으며, 꼽추의 등이 펴지고 장님이 눈을 뜨는 등 엄청난 기사이적이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집회에 같이 갔던 분들이 모두 열흘 동안 밥을 세 끼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면서, 어찌나 기쁘고 즐거운지 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동생은 “언니! 박태선 장로님은 한국 땅에 나타나신 의인이야. 언니도 이 진리를 알아야 돼.” 하며 계속 설교 말씀을 들려주고 찬송가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집회에 다녀온 분들이 작은어머니 댁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자 동생은 저도 예배에 가자고 권유했습니다. 당시 저는 혼인 날짜를 잡아 두고 결혼식 준비로 바쁠 때여서 전도관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밤마다 들려주는 동생의 이야기에 차츰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격이 급하고 날카로운 면이 있었던 동생이 박 장로님 집회에 다녀온 뒤로 딴사람이 된 듯 부드럽고 온순해진 것을 보면서 전도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시집가서 전도관에 못나오면 어쩌지’ 고민하며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걱정말라는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
그 후 걱정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안해져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잇몸이 좋지 않았던 저는 잇몸이 붓고 고름이 나오며 몹시 쑤시고 아파서 끙끙 앓고 있는데, 동생이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거라며 사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탕을 입 안에 넣는 순간 못 견디게 쑤시고 아프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부어올랐던 잇몸이 가라앉으면서 고름도 멈추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즈음 동생에게 계속 이야기를 들으며 전도관에 관심이 생겼던 저는 직접 그런 일을 체험하고 보니 꼭 전도관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과 달리 여러모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시골에서는 결혼을 앞둔 처자가 밖으로 나다니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는데, 완고하신 어머님은 제가 전도관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는 심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이 되는 것은 ‘결혼하고 나면 시골 양반인 시댁에서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텐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민하면서 잠이 든 저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제가 ‘만약 시집에서 전도관에 못 다니게 하면 어쩌지.’ 하며 걱정하는데 어디선가 “걱정하지 마. 그 집에 가면 전도관에 나올 사람이 두 사람 있어.”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부드러운 음성은 제 마음을 포근히 감싸는 것 같았으며, 제 사정을 다 아시고 꼭 도와주실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꿈을 꾸고 얼마 후에 또다시 꿈을 꾸게 되었는데,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고 그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신사 분이 활짝 웃으시는 꿈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동생이 가져온 박태선 장로님의 설교집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교집 표지에 실린 박 장로님의 사진이 바로 제가 꿈에서 뵈었던 바로 그 신사 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무엇보다 꿈을 꾼 후부터 머릿속에 가득 찼던 고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을에 우정면 매향리로 시집간 후 전도관에 나가지 못했지만 항상 꿈속에서 들었던 말씀을 생각하며 언젠가는 전도관에 다닐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지냈습니다.
박 장로님께 안수를 받는 순간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고 상쾌해져
`여기가 아픕니다` 아픈 무릎을 가리키니 무릎을 향해 축복해 주시고
`이제 됐어요`라고 하셔서 돌아서 나오는데 전혀 아프지 않아
결혼하고 3년이 지난 후 저는 시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한 달에 한 번씩 향남면 발안제단에 가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제단에서 찬송을 부르고 설교 말씀을 듣는 시간이 참으로 기쁘고 즐거워서 예배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설교 시간에 전도사님은 박태선 장로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데, 특히 ‘더럽고 누추하던 마음이 성신으로 씻음을 받아 눈보다 더 희게 되어야 된다. 그런 존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자격자이다.’ 하시는 말씀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도 성신을 받아 성결한 자격을 갖추어서 꼭 천국에 가고 싶다는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그 후 1963년에 저희 가족은 시댁에서 분가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섣달 그믐날에 시댁에서 일을 돕고 돌아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다음 날부터 갑자기 무릎이 아픈 것이었습니다.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서 집안일을 할 수가 없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퉁퉁 부어올라 아무리 해도 구부려지지 않았습니다. 동네 의사에게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관절염이라며 약과 주사를 처방해 주었지만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도 증상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 달이 넘도록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박 장로님께 안수를 받으면 나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아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의 체험담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제가 남편에게, 덕소신앙촌에 가서 안수를 받으면 나을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남편은 처음에 반대하다가 제 병에 차도가 보이질 않자 안수를 받아서 나을 수만 있다면 신앙촌에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발안제단 전도사님의 사모님께 연락하여 그분의 부축을 받아 덕소신앙촌으로 갔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서 있지도 못하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덕소까지 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병이 나을 거라는 희망으로 마음만은 가벼웠습니다. 덕소신앙촌에 도착해 보니 예배를 드리기 전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안수를 받고 있었습니다. 저도 차례를 기다려 안수를 받았는데 박 장로님께서 제 머리에 안수하시는 순간, 입으로 사탕 같은 것이 쏙 들어오는 느낌이 들더니 속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하고 상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릎을 가리키며 “여기가 아픕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박 장로님께서는 제 무릎을 향해 “쉭!” 하며 축복하시고 “이제 됐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서 나오려는데 놀랍게도 무릎이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만 해도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도 없었는데, 안수와 축복을 받고 나니 아프기 전과 다름없이 가볍게 걷고 뛸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예배를 드린 후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오면서 싱글벙글 웃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