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수 관장 편 (32) 모든 예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았으면 말씀대로 순종하고 죄를 벗어야하나님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예배의 중요성도 여러번 말씀 하셨습니다. 1980년 12월 15일 하나님 말씀에 “새벽기도뿐만 아니라 정식예배는 억 만번 죽어도 나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7장 27절에 『죄를 위하여 날마다 마땅히 제사 드려야 한다』는 기록도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1985년 12월 2일 축복일 예배 때 “학생들도 유년까지라도 구원 얻으려면 새벽기도고 낮 예배고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새벽예배를 빠지지 말아야
제가 부산 연산동 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을 때인 1986년 12월 3일 연산동교회 주일학생 중에 정성숙 권사의 외아들 박진환 군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 사정을 알아보니 엄마 정성숙 권사와 둘이 자다가 연탄가스에 중독이 되어 엄마는 의식을 완전히 잃어 혼수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고 아이는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정 권사의 외아들인 박진환군은 여섯 살 아이로 어려서 아직 학교에는 다니지 않았지만 평소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축복일 예배에도 빠지지 않았던 아이라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사망한 유년주일학생
생명물로 씻기자 살아있을 때보다 더 예뻐져
저는 부관장과 함께 아이의 시신을 생명물로 정성껏 씻기고 흰 수의를 입힌 후 입관예배를 드렸습니다. 아이는 너무도 곱게 잘 피어서 입술과 볼이 발갛고, 귀까지 발그스름한 빛을 띠어 살아있을 때보다도 더 예뻤습니다. 저는 예쁘게 핀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가 생전에 교회에 오는 것을 무척 좋아해서 더 예쁘게 피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유가족들은 입관 때 아이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보니 정말 살아있는 아이라고 생각 될 정도로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엄마는 계속해서 의식을 찾지 못하여 결국 아이의 장례식에는 참석 하지 못했습니다. 유가족들은 정성숙 권사가 깨어난 직후에는 아이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을까봐 바로 알리지 못하고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고 나서 생명물로 예쁘게 핀 아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둘이 밭을 갈매
하나님께서 1986년 12월 5일과 12일, 그리고 1987년 1월 2일 그렇게 3일간 저희 최고위원들을 오라고 하셔서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축복을 해 주시면 죄의 부담으로 하나님께서 무척 힘이 드실 텐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받고 돌아가는 저희들에게 밍크담요와 과자 두 박스씩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가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께서는 저희의 죄를 다 안아맡으시고 저희들에게는 언제나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1987년 축복일 예배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삽입하신 성경 구절 가운데 마태복음 24장 40절에 기록돼 있는 “둘이 같이 밭을 갈 때 하나는 내버려 두고 하나는 데려간다”는 구절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1985년 12월 5일 만찬회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둘이 같이 밭을 갈 때 하나는 내버려 두고 하나는 데려간다는 이것은 어떤 세기적인 신학자도 그 질문을 하면 답변을 못해요. 왜 하나는 버려두고 하나는 데려가나 하나님이 삽입한 고로 무슨 이유인지 몰라요.”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대로 있다는 것은 데려가는 것은 영으로 변하여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는 육으로 살다가 죽어 썩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아주 무서운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슬성신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여 죄를 벗지 못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두려운 말씀이 바로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밝혀주심으로 정확히 알게 된 성경구절입니다. 기성교회 목회자나 그 이외 어느 누구도 모르는 하나님 말씀을 억지로 함부로 해석하고 설교하였다면 모두 거짓 설교를 한 것입니다.
1987년 기장신앙촌 실내체육관 성황리 개관
개관식에는 한국 농구계의 원로들이 참석
개관식 끝난 후 축하 기념 경기 펼쳐
1987년 우리나라 사회는 전국의 시민, 학생, 노동자가 참여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이 일어나 곳곳에 데모가 일어나고 시국이 불안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1987년 5월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전국에 있는 교회에서 교인들이 각 제단에 모여 다 함께 시국안정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1987년 5월 31일은 제7회 이슬성신절 예배가 기장신앙촌에서 있었습니다. 이슬성신절 예배를 드리고 2부 순서로 음악회가 열렸는데, 음악회는 여러 팀이 예선을 거쳐 이슬성신절 음악 무대에 서는 팀을 선정하는 경연대회 형식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있던 부산지역 합창단도 무대에 섰던 것입니다.
1987년 6월 16일 저는 부산 연산동교회에서 광주교회로 발령이 났습니다.
광주로 발령이 나고 얼마 후 1987년 7월 15일부터 16일 2일간에 걸쳐 제주, 경상, 전라, 강원도 지역에 큰 태풍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한반도에 상륙한 7월의 태풍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고 평가되는 태풍 ‘셀마’로 인해 그 당시 하루에 내린 강수량 기록을 싹 갈아치울 정도로 비가 엄청나게 왔었고 당시 우리나라에 사망, 실종 333명의 인명피해와 2천여 억원의 재산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1987년 7월 26일 광주 KBS에 신앙촌 간장 특품을 광주교회 이름으로 수재의연금품으로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1987년 8월 2일은 전국 남녀 교인 특별 집회가 기장신앙촌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기장신앙촌 실내농구장을 성황리에 개장을 했습니다. 개관식 축하기념경기를 위해 상업은행 여자농구팀, 코오롱여자팀, 삼천포 여자종고팀, 부산동주여상팀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행사를 보도한 1987년 8월 17일자 신앙신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삼복중인데도 전국에서 모여든 식구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지난 2일 기장신앙촌에서 있었던 축복일 집회는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는 듯 은혜를 강구하는 식구들이 운집한 가운데 이슬 같은 은혜가 창파를 이루는 성스러운 모임이었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진행된 이날 예배에서도 다시 한번 ‘죄와 상관없는 자’, ‘의로운 자격을 갖추라’는 말씀이 강조되었다.
이보다 앞서 실내체육관이 완공되어 이를 축하하는 개관식이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개관식에 농구계에서는 이병희(아시아농구연맹회장), 조동재(대한농구협회부회장), 박치노(한국여자실업농구연맹 사무국장), 김정신 씨 등 농구계의 원로들이 참석했다.
개관식이 끝난 후 진행된 축하 농구경기에는 실업팀에서는 상업은행과 코롱이 겨뤘으며 삼천포 여상, 동주여상이 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