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안찰을 받았는데 실제로 멍이 들고 아프다니

이명호 권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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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7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8·15 해방이 되어 한국에 돌아와 인천 도화동에서 살게 되었으며, 일본에서 아버지를 여읜 후로 어머니 혼자 어렵게 생계를 꾸리셨습니다. 숭의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시내의 한 침례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학비가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에서는 필수과목으로 성경 수업을 들었으며 매일 아침마다 예배에 꼭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저는 시간이 갈수록 교회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뜻밖의 모습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육이오전쟁 직후라 외국에서 구호물자가 많이 오던 시절이었는데, 그 교회에 구호물자가 오면 좋은 물건을 선별해 목사나 장로 등 높은 사람들이 챙겨 갔으며, 교인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일렬로 줄을 세운 후에 허름한 옷가지를 하나씩 던져 주곤 했습니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였던 저는 그 모습에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끼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좋은 물건을 주고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교회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송도고등학교에 진학해 학업을 계속했습니다. 하루는 영어를 가르치는 임상희 선생님이 수업 시간 중에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라는 분이 나타나셨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영어 시간이면 박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셨는데, 박 장로님께서 집회하시는 곳마다 엄청난 기사이적이 일어나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며 병이 나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 점점 관심이 생겨서 영어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박 장로님에 대한 말씀을 새겨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6년 5월, 저는 짠지공장 2층에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전도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곳에 찾아가 보았는데, 박 장로님께서 일요일에 인천전도관에 오신다는 희소식을 듣고 그 주 일요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인천전도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이윽고 새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셔서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저는 설교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여 경청했습니다. 특히 기성교회가 구호물자 다툼이나 하며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씀을 하실 때는 침례교회에서 겪은 일들이 떠올라 ‘맞습니다!’ 하며 속으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구원을 얻으려면 성신을 받아 죄를 씻어야 하며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시는데, 그동안 기성교회에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인천전도관에 다니며 새벽예배에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성경 구절을 세세하게 풀어 주시는 말씀이 너무도 새롭고 재미있었으며, 찬송을 부를 때는 충만한 기쁨이 물밀듯 제 마음속에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아침저녁으로 중국집에서 일했기 때문에 새벽예배를 마치면 음식점까지 15리를 가야 했는데, 예배를 마친 후 기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면서 그 길을 힘껏 달려갔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숭의동에 큰 규모의 전도관을 짓게 되면서, 저는 방과 후 공사 현장에 가서 제단을 건설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제단에는 저뿐만 아니라 열심히 건설 일을 돕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다른 학생 두 명과 함께 제단 부지에 있던 건물을 철거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옥상에 올라가 피뢰침을 내릴 때 여태껏 맡아 본 적이 없는 아주 좋은 향기가 지속적으로 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과 서로 “이게 무슨 냄새일까? 정말 좋다.” 하며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옥상에서 내려온 후에도 향기가 끊임없이 맡아져서 교인 분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좋은 냄새가 바로 향취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때 처음 향취를 맡았던 저는 ‘아! 말로만 듣던 향취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참으로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 후 제단 건설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 종각을 세우는 공사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김성국이라는 초등학생이 언제 올라갔는지 공사 중인 종각에 올라갔다가 거꾸로 떨어져 의식을 잃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가까운 곳에 별다른 병원 시설이 없어서 어찌 해야 좋을지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때마침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기 위해 인천제단에 도착하셔서 긴급히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성국이가 있는 제단 사택으로 향하셨으며,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의식을 잃은 성국이를 향해 “일어나라!” 하고 말씀하시니 거짓말처럼 아이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저는 그 순간 놀라움을 다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국이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부끄러웠던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들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예배를 마친 후에도 이 일에 대해서 떠들썩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후 숭의동제단 교인의 세 살배기 딸아이가 숨을 거두어서 입관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뽀얗고 예쁘게 핀 시신을 얼마간 제단에 안치해 두고 많은 교인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저는 ‘어쩌면 죽은 아이가 저리도 고울 수 있을까!’ 하며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또한 지나가는 행인들도 제단에 들어와서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제단에 계속 다니던 어느 날, 저는 꿈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새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하나님께서 제 배에 손을 대시고 “쉭! 쉭!” 하시며 안찰을 해 주셨는데, 저는 심한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에도 계속 배가 아파서 옷을 들춰 봤더니 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꿈속에서 안찰을 받았는데 이렇게 실제로 멍이 들고 아프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제단에 갈 준비를 하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혁대를 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등단하신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어젯밤 꿈에 내가 안찰해 준 사람이 여러 명 있습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에 정말이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두 번 더 꿈속에서 안찰을 받으면서, 저는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가슴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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