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한 바다에 조각배 같던 제게 등대같은 불빛이…
이정열(1) / 기장신앙촌저는 1937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났습니다. 경기도 출신이신 아버님은 결혼 후 일본에 건너와 저를 낳으셨는데, 직장 생활을 하셔서 9남매 저희 형제들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아홉 살 때 8.15 해방이 되어 온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수원에 정착한 후 아버님과 오빠들은 일자리를 구하려고 나섰지만, 우리나라가 무척 궁핍하던 시절이라 마땅한 직장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는 동안 힘겹게 대가족의 살림을 꾸리시던 어머니는 가슴앓이로 시름시름 아프시더니 1950년 육이오전쟁 중에 결국 숨을 거두시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는 이질을 앓으시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으며 전쟁의 혼란 속에서 형제들은 하나 둘씩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열다섯 살 되던 무렵이었습니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부모님을 잃고 처참한 전쟁을 겪으면서, 저는 수렁에 빠져 드는 것처럼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막막한 외로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항상 말없이 우울하고 어두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큰오빠가 수원 집으로 돌아와 저는 큰오빠네 식구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큰올케의 먼 친척 되시는 김 권사님이라는 분이 가끔씩 올케를 만나러 집에 오시곤 했는데, 어느 날 저는 김 권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김 권사님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유명한 분에 대해 말씀하시며 “그분은 은혜를 내리셔서 심령의 병도 고치시고 육신의 병도 고치시는 분이에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박 장로님이 수원전도관에 오셔서 부흥집회를 하시는데 거기에 같이 가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습니다. 당시 늑막염을 앓고 있었던 저는 병이 낫는다는 말에 ‘거기 가면 내 병도 나을까?’ 하고 순간적으로 솔깃해졌습니다. 저는 수원 도립병원에 다니며 늑막에 고인 물을 빼내고 약을 지어 먹었지만 항상 가슴을 쿡쿡 쑤시는 통증이 있어서 생활하기에 너무도 불편했습니다. 그때 다시 생각하기를 ‘아니야, 병원에 다녀도 잘 안 낫는데 그런 데 간다고 어떻게 병이 낫겠어?’ 하며 처음에 솔깃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집회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김 권사님이 세 번씩이나 찾아와서 간곡하게 권유하시는 것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고, 결국 저는 집회가 열리는 날 김 권사님을 따라 수원전도관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7년이었습니다.
큰 건물을 예배실로 단장해 놓은 수원전도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김 권사님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가 단상과 가까운 앞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예배 시간에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부른다고 하시며 “찬송을 몰라도 힘차게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따라 불러 보세요.”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곧이어 단상에 올라오신 박태선 장로님은 단정한 양복 차림의 신사 분이었으며, 군중을 바라보시는 모습이 참으로 온화하고 인자하게 느껴졌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찬송을 부를 때 저는 손뼉을 치는 것이 왠지 창피한 생각이 들어 손뼉을 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손뼉을 치며 기쁘게 찬송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기서는 손뼉을 안 치는 것이 더 창피한 일이겠구나.’ 하며 저도 손뼉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찬송가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찬송을 여러 번 반복해서 부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곡조를 익히고 가사의 뜻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집회장의 군중들 속에서 목청껏 찬송을 부르던 중에 “제가 사람 가운데 의지할 이 없으니 슬픈 자가 됩니다~” 하는 찬송을 부를 때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마치 제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찬송가였습니다. 그 찬송가의 가사대로 “맘이 어두웠으니 밝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도드리면서 그동안 외롭고 막막했던 시간들을 하나님께 다 고했습니다. 부모님을 잃은 후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며 괴로워했던 근심과 두려움이 서서히 걷히면서 제 마음이 어느새 포근하고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깜깜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조각배와 같았던 저에게 등대의 환한 불빛이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마음이 밝고 편안해진 저는 ‘세상을 살면서 이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있을까?’ 하며 잠시라도 집회장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집회 기간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저는 집회가 열린 엿새 동안 계속 철야를 하며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설교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마음이 어찌나 기쁘고 즐거운지 말로는 다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제 가슴속에는 ‘하나님! 끝까지 이 길을 따라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쉼 없이 울렸습니다. 이제 길을 찾았으니 끝까지 따라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집회 중 어느 날인가 찬송을 부를 때는 사탕처럼 달콤하면서도 아주 향긋한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냄새가 어찌나 진하게 나는지 마치 향기로 된 덩어리를 계속해서 콧속으로 넣어 주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집회장에서 주위에 앉은 분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은혜를 받으면 좋은 향기를 맡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에 ‘아! 사람들이 말하던 향기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늑막염을 앓았던 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항상 가슴을 쿡쿡 쑤시는 통증이 있었는데, 집회에 참석하는 동안 그 통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