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두운 눈을 밝혀 천국을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

김인안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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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힘차게 손뼉을 치면서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을 부를 때, 제 마음에는 밝고 환한 기쁨이 깃들었습니다. 온몸이 날아오를 듯 가벼워지며 점점 차오르는 기쁨과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집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무겁고 답답한 한숨에 싸여 있었던 제 모습이 떠오르면서 ‘지금까지 세상을 헛살았구나.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가면 살길이 열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선가 아주 달콤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싹 하며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냄새는 당시 구호품으로 먹어 봤던 미제 초콜릿 냄새 같기도 하고 상큼한 과일 향과 비슷하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냄새였습니다. ‘누가 좋은 향수를 뿌리고 왔나?’ 하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제 곁에는 집회장에서 철야한 사람들만 있을 뿐 향수를 뿌렸을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아! 사람들이 말하던 향기가 바로 이것이구나!’ 하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없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천국에는 이런 하늘의 향기가 가득하겠지요.’ 하면서 귀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한강 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후 저의 생활 속에서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밖에 나갈 때도 찬송, 집에 들어올 때도 찬송, 계속 찬송을 부르는 저를 보고는 큰딸인 혜자가 “엄마, 뭘 그렇게 흥얼거려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찬송가 부르는 거야.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른단다.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갔다 왔더니 내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어.” 하고 대답했습니다. 딸아이가 “거기가 그렇게 좋아요?” 하고 되묻기에, “그럼! 귀한 말씀을 해 주신단다.” 하며 죄짓지 말라고 강조하셨던 설교 말씀을 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혜자야, 하나님을 믿으려면 그렇게 믿어야지 싶더라. 우리가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당에만 나오면 다 구원 얻는 줄 알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천국에 가겠니.” 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다니던 영등포 장로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으며, 몇 개월이 지나 원효로 하나님 댁에 예배실이 마련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여러 명의 권사와 집사를 임명하실 때 뜻밖에 저도 권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날 직분을 받은 사람들에게 안찰을 해 주셔서 저도 안찰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손이 제 눈에 닿는 순간 어찌나 아픈지 눈앞에 별이 번쩍이고 눈알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안찰을 받은 후에는 너무나 향긋하고 좋은 향취가 진동하여 마음 깊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1956년 여름에는 하나님께서 서울 시내를 구역별로 심방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가가호호 다니시며 심방을 하시는 동안 사람들이 수백 명씩 무더기로 따라다녀서 ‘무더기 심방’이라고 했으며 ‘영적 수도 공사’라고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교역자와 교인들과 함께 영등포 피난민촌의 저희 집에 오셨을 때, 저는 송구한 마음으로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지붕 낮은 판잣집에 허리를 굽히고 들어오신 하나님께서는 저희 식구들 한 명 한 명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 기도하시며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누추한 곳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친히 오셔서 은혜를 부어 주신 하나님. 저는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려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입니다.

그 후 1957년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다양한 신앙촌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으로 활동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소사신앙촌을 거쳐 덕소신앙촌에 입주를 했습니다. 신앙촌 제품을 써 본 고객들은 품질이 너무 좋다면서, 당시 최고로 알았던 미제에 비유하며 “신앙촌은 한국 미제”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원래 성격이 조용한 저는 장사를 하면서도 언변이 그다지 능숙하지는 못했는데, 물건을 써 본 사람들이 저보다 먼저 나서서 신앙촌 제품을 알리며 고객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신앙촌 제품을 믿고 애용하는 분들의 집을 방문하면 언제든지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서로서로 좋은 친구이자 친자매처럼 지냈습니다. 그렇게 소비조합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저희 가족은 덕소신앙촌에서 예쁜 화단이 있는 2층 양옥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단골 고객들이 “신앙촌 아줌마는 어떤 데서 사는지 구경 좀 시켜 줘요.”라고 하여, 고객 열두 분을 덕소신앙촌에 모시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바쁘고 활기차게 돌아가는 공장 지대와 장미꽃이 만발한 주택가를 구경하면서 “제가 여기서 살아요.”라고 하자,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던 그분들은 자신들도 여기서 살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여기는 신앙인들이 사는 곳인데요.” 했더니 “신앙촌 아줌마는 정말 천국 같은 곳에 사네요.” 하면서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후에도 그분들은 신앙촌이 참으로 평안하고 아름답더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습니다.

고객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방문 판매를 했던 저는 바쁜 걸음을 옮기면서 항상 찬송을 불렀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모든 것을 고한 사람 복 받네.” 찬송가 418장은 제 마음의 간절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살길이 막막하여 걱정과 근심으로 무거웠던 짐을 벗게 하시고, 어둔 눈을 밝혀 천국을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 그 한없는 축복에 어떻게 다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40여 년 동안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활동해 온 저는 2001년 12월 기장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아흔이 가까운 지금까지 병원과 주사를 모를 만큼 건강하게 지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신앙촌의 노인 학교인 ‘은빛 교실’에 가는 것이 큰 즐거움인데, 요즘에는 시온실고 1학년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하여 더욱 즐겁고 재미있습니다. 만들기 수업을 할 때는 학생들이 할머니들의 서툰 솜씨를 도와주고, 낭랑한 아이들의 목소리와 함께 찬송가를 부를 때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귀한 신앙의 터전을 일구어 주신 하나님. 그 은혜와 사랑을 세상의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뿐입니다. 남은 여생 구원의 말씀을 따르며 살다가 그날에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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