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집회에서 받은 기쁨과 즐거움은 큰 위로가 되고

김영애 권사 / 대신 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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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27년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결혼하여 부산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라고는 전혀 모르고 살던 제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큰아들을 데리고 하나님 집회에 참석하면서였습니다. 당시 아홉 살이던 큰아들은 말이 너무 늦어서 “엄마”, “할배” 하는 두 마디 외에는 다른 말을 전혀 못 했습니다. 큰아들은 태도가 바르고 용모가 준수한 데다 듣는 것에 큰 불편이 없어 보여서, 저는 ‘언젠가는 말을 하겠지.’ 하며 기다려 보았지만, 아홉 살이 되도록 말이 늘지 않고 병원에 갈 형편도 되지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1955년 5월, 이웃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집회를 하시는데, 장님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한다며 큰아들을 데리고 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불교를 열심히 믿는 시어머니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집회에 한번 참석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큰아들과 함께 공설운동장에 갔을 때는 집회 3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빈틈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뚫고 앞자리에 가서 보니, 단상에 서신 박태선 장로님은 아주 젊은 청년으로, 운동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크고 우렁찬 음성으로 찬송을 인도하셨습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찬송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저녁예배가 끝난 후에도 자리를 뜨는 사람은 별로 없고 많은 사람들이 집회장에서 철야를 하는 가운데 저도 아들과 함께 밤을 새웠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영광을 돌릴 때였습니다. “할렐루야!” 하고 외치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무엇이 타는 냄새가 나다가 싹 사라지고, 다음에는 형용할 수 없이 좋은 냄새가 맡아지면서 꼭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시원한 것이 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시원하면서 기분이 상쾌해지는데 그 기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운동장 이곳저곳에서는 “벙어리가 말을 합니다!”, “장님이 눈을 떴습니다!” 하며 병 나은 사람들이 기뻐 소리를 쳤습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때 맡았던 무엇인가 타는 냄새는 저의 죄가 타는 냄새였고 좋은 냄새는 향취 은혜였습니다.

그 집회에서 받은 기쁨과 즐거움은 제가 그때껏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정에 소홀한 남편을 대신해 살림을 꾸리고 자식들을 돌보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친 상태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 집회에서 받은 기쁨과 즐거움은 큰 위로가 되었고 어두웠던 제 마음을 밝게 해 주었습니다. 공설운동장 집회가 끝난 뒤에도 어디 가야 이런 은혜를 받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동일교회에 다니는 이웃 아주머니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동일교회에 한두 달 정도 다녔을 때였습니다. 어느 주일예배 시간에 목사가 하는 말이 “박태선 장로가 성신을 받았으면 겸손해야지, 이곳저곳 다니면서 소란을 피운다.”며 하나님 집회에 가는 사람은 교적부에서 제명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목사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얼마 후 신광 장로교회에 하나님을 모시고 집회를 연다는 소식이 들리자, 하나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반가워하며 그곳으로 달려갔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날 신광교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교회 안은 말할 것도 없고 문밖까지 빽빽히 서 있었습니다. 앞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에 교회 옆문으로 간신히 들어간 저는, 예배를 드리면서 너무나 좋은 향취를 강하게 맡았으며 마음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몰랐습니다. 그 집회 후 하나님을 중상 모략하는 동일교회에 발을 끊고 신광교회에 다녔는데,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신광교회에 몰려오면서 신광교회는 크게 부흥이 된 반면, 동일교회는 교인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해 가을에는 삼일 장로교회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렸습니다. 넓은 교회 마당에 크게 천막을 치고 일주일 동안 계속 집회를 했는데, 저는 큰아들, 작은아들과 함께 일주일 꼬박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에 참석한 후로, 말이 늦었던 큰아들이 차차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할배” 두 마디 외에는 전혀 못 했던 애가 어느 때부터인지 자연스럽게, 말이 늦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할 만큼 말을 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이듬해 봄에는 대신동 전찻길 옆 간장 공장 건물에 부산전도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개관집회도 열었는데, 개관집회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일을 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셔서 저는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손을 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심방 위원으로 임명받아 조별로 거의 매일 교인들 집에 심방을 다녔습니다.

1960년경 공 집사님 댁에 심방 갔을 때 일입니다. 이북에서 내려온 공 집사님은 동대신동 산꼭대기 흙담집에서 살았는데, 그 집에서 공 집사님과 몇몇 이웃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하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들 중에는 교회에 안 다녀 본 사람도 있었지만, 다들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서 간절하게 찬송을 부르는 모습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고단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면서 큰 위로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저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중 한 분은 예배를 드린 후 마음이 너무 편안하고 좋다고 하더니 나중에 범천제단 교인이 되어 제단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라오면서 죽은 시신이 은혜를 받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을 셀 수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안 좋은 모습에 고약한 냄새가 나던 시신이라도 정성껏 예배를 드리고 생명물로 깨끗하게 씻기면, 시신이 뽀얗게 피어나면서 때로는 향취가 맡아지기도 했습니다. 그중 몇 년 전에 대신동교회 교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2001년 김두희 씨(前 교역자)의 어머니가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고인은 초창기 때 하나님을 믿었던 분으로 심성이 너무나 고우셨고, 생명물을 드리면 참 좋아하시며 잘 드셨다고 합니다. 운명 소식을 듣고 가 보니, 100세 가까운 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운 얼굴에 편안하게 잠을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신동교회 관장님과 교인들이 정성껏 예배를 드리고 생명물로 깨끗하게 씻겼더니, 그 전보다 훨씬 뽀얗고 아름답게 피어났으며 온몸이 노긋노긋 부드러웠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고인의 편안하고 고운 모습에 감탄하면서 크신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 ‘하나님 은혜 감사합니다.’는 기도가 절로 드려집니다. 언제든지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고, 귀한 은혜 안에서 기쁘고 즐겁게 이 길을 따라올 수 있었습니다. 그 감사함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앞으로 남은 시간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길 기도드리며 구원의 그날까지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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