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을 밝혀 주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히 울려

서영자권사(4) / 덕소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71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그 후 저는 1961년에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차멀미가 무척 심했던 저는 장사를 나가면서 멀미할 것이 걱정되었는데, 장사 첫날부터 거짓말처럼 차멀미가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차가 멀리서 지나가기만 해도 속이 뒤집어질 듯이 멀미를 했던 제가 차를 타고 아무리 먼 거리를 다녀도 멀미가 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저는 메리야스를 들고 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얼마 후부터 제과류를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1964년에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후에는 남편과 같이 소비조합을 했는데, 점점 장사가 커지면서 카스텔라와 캐러멜을 한 트럭씩 받아 서울에서 경기도 파주까지 배달하며 판매를 했습니다. 신앙촌에서 정성껏 만든 카스텔라와 캐러멜은 당시 견줄 상품이 없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어서 참으로 신바람 나게 장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소비조합을 하던 어느 날, 서울 북아현동의 단골집에 갔을 때였습니다. 그 집 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이, 자신의 동생이 안양에 있는 교회의 목사인데 신앙촌 아줌마를 꼭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목사가 나하고 성경 토론을 하자고 하는 것일까? 나는 목사보다 성경을 잘 모르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만나기가 망설여졌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몇 번이나 만나 달라고 부탁을 하니 더 이상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그 단골집에서 목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그 목사가 “아주머니는 어떻게 해서 신앙촌에 들어가게 됐습니까?” 하고 질문하여, 저는 하나님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장로교회에 다녔지만 직접 성신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 집회에서 분명하게 성신을 체험하고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온 가족이 신앙촌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과거에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생활을 벗어 버리고 지금은 자유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되는 자유율법을 설명하자, 목사는 “믿으려면 그렇게 믿어야 되지요.” 하더니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저는 장사를 다니는 중에 종교에 관해 토론을 하게 되면 신앙촌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신앙촌에서는 부지런하고 근면하게 생활하며 양심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이야기하면, 과연 진실되게 믿는 곳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후 1976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마흔네 살이었던 시동생이 간암 말기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이야기를 듣고 저는 ‘마지막으로 시동생을 꼭 만나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한 시동생은 사업으로 자수성가하여 부유하게 살고 있었는데, 언젠가는 교회를 지어 목회를 하겠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동생은 저희 가족이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몹시 반대하면서 “왜 고향을 등지고 굳이 신앙촌에 들어갔나?” 하는 것이 큰 불만이었으며, 가끔씩 시아버님과 만날 때면 몇 시간씩 종교 토론을 하곤 했습니다. 저는 시동생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시동생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가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귀한 생명물을 한 번이라도 먹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생명물을 지니고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시동생이 저희 가족은 병문안을 오지 말라고 하여 저는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한 달이 넘도록 매일같이 찾아간 끝에 결국 시동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생명물을 한 컵 놓고 ‘이 물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귀한 은혜가 담긴 물’이라고 하며 마시기를 권했더니, 시동생은 의외로 선뜻 받아서 마셨습니다. 당시 시동생은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주스만 조금씩 마셨는데, 생명물을 마신 후로 주스가 먹기 싫다며 매일 생명물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버지 어머니 좀 모시고 와 주세요.” 하며 저에게 부탁할 때, 이전의 강퍅하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이 너무도 공손한 모습이었습니다. 시부모님을 만난 시동생은 그동안 불효한 것을 용서해 달라며 눈물을 글썽였고, 시부모님께서 은혜 받으신 일과 신앙촌에 대해 말씀하시자 이전과 달리 그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후로 시동생이 예배를 드려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관장님을 모셔 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웃의 기성교회에서 여러 번 찾아와 예배를 봐 주겠다고 했지만 시동생은 단호하게 거절했으며, 관장님께 계속 부탁을 하여 매일같이 전도관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간암 말기에는 진통제 없이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들었는데, 시동생은 별다른 고통 없이 지내다가 잠을 자는 듯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장례를 전도관식으로 치르게 되어 시신을 생명물로 깨끗이 씻긴 후에 봤더니,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입관예배를 드리는 내내 진동하는 향취를 맡으면서 저는 귀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 1990년 8월에는 덕소신앙촌의 백일심 권사님이 자궁암을 앓다 운명하시게 되었습니다. 권사님은 이북에서 내려와 가족이나 친척이 없었기에 교인들이 마음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권사님이 입원해 있던 서울시립 동부병원에서 입관식을 하게 되어 다른 교인들과 같이 병원에 갔는데, 시체 보관실에서 시신을 꺼내 보니 놀랍게도 온몸이 산 사람처럼 노긋노긋 부드러운 데다가 얼굴이 아주 곱게 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비쩍 말랐던 몸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뽀얗게 핀 얼굴에는 이슬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저는 장례예배에 다니며 아름답게 핀 시신을 많이 봤지만 그렇게 이슬방울이 맺힌 시신은 처음 보았습니다. 장례반의 박달막 권사님이 수건으로 고인의 얼굴을 닦아 주고 나면 또다시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그 모습이 화장을 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곱고 예뻤습니다. 생명물로 씻기며 예배를 드린 후에는 더욱 환하게 피어서, 그 자리에 있던 교인들 모두 아름다운 시신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다시금 떠오릅니다. 기쁨에 가득 차서 불렀던 찬송과 구원의 길을 밝혀 주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서 쟁쟁히 울립니다. 이 길을 따라오며 은혜 주시는 대로 아름답게 살지 못한 제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은 그 뜻대로 행하며 맑고 성결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귀한 은혜로 함께하여 주시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