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제단’, 천부교 첫번째 교회(4)

친히 모든 교인 가정을 심방하심
발행일 발행호수 2068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서울전도관 임원동반 서울 각 구에서 연합예배, 친히 모든 교인 가정을 심방하심.

1956년 3월 11일자 신앙신보는 원효로 전도관의 초창기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원효로 3가에 임시 전도관을 짓고 예배를 본지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건만 박장로님의 은혜 충만한 설교를 듣고 또 들으려고 낮 예배는 물론 밤 예배까지 멀고 가까운 거리를 막론하고 서울원효로 전도관과 인천전도관에 쇄도하는 군중을 볼 때 이는 확실히 이 나라 심령계의 부흥됨을 여실히 증거하는 것이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지방 순회일정 외에 친히 서울 시내를 누비시며 교인들의 가정을 심방하시는 ‘무더기 심방’을 하셨다. ‘무더기 심방’이란 하나님께서 심방하실 때면 30명이고 50명이고 교인들이 한 무더기씩 따라 다녔고 또 한 구역을 모두 심방했다하여 그렇게 불렀다.

하나님께서 하신 ‘집단 심방’은 1957년 7월 8일자 본지에 ‘서울시 각구 집단심방’이라는 제목으로 기사화 되어 있다. 그 기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1956년과 1957년도에 서울 전도관 임원들을 동반하여 서울 시내를 누비시며 심방 전도를 하셨는데 하오 4시에는 성북구 돈암동 전차 종점 옆 광장에서, 하오 8시에는 동대문구 신설동 광장옆 기도처에서 하는 식으로 약 4시간 간격으로 하루에 두 구역씩을 심방하셨다. 그 구역의 어떤 넓은 장소에 운집한 신도와 불신자 앞에서 연합예배 형태로 집회를 가지시고 다음에는 4시간 동안 그 구역의 교인 집을 빠짐없이 심방하신 후 다음 구역으로 이동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심방을 나오시면 그 지역의 교인 집이 20집이면 20집, 30집이면 30집 한 곳도 빠짐없이 심방을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구로구 구역장 직을 맡아 일을 할 때라 하나님께서 저희 구로구에 심방을 오시면 끝까지 따라다녔습니다.` 김영정 승사(전직 관장, 78세. 기장신앙촌)의 증언이다.

`교인 중에는 남편 없이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이 심방을 하신다고 해도 공장에 나가느라 집을 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이재현 집사라는 분 댁에 심방을 가셨는데 추운 겨울에 방 식지 말라고, 아이들이 오줌을 싸 지린내 나는 포대기를 방에 깔아 놓고 집사님은 공장에 나가고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곳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 포대기 속에 손을 넣어 소리 없이 기도를 하시고는 주머니에서 준비해 오신 돈을 꺼내 그 속에 넣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의 어려운 사정을 미리 아시고 금일봉을 준비해 오셨던 것입니다.

저는 심방을 다 마치고 그 집으로 다시 갔습니다. 그리고 집사님과 나는 둘이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 울었습니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가시는 곳곳마다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디서 그런 사랑을 받겠는가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당시 군인 신분이었던 석세조 중위(현 시온고등학교 교장)는 호기심으로 원효로 전도관을 찾았다가 은혜를 받게 되었다.

`저는 어느 교회에 나가든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는 생각에 처음에 전도관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다만 박태선 장로님이 부흥사로서 수많은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이 나돌아 보통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제 여동생들이 박태선 장로님 부흥집회에 다녀와선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고, 성신의 불이 내려와 죄를 태우니 송장 타는 냄새가 나며 향취가 맡아지고 이슬성신이 뽀얗게 내린다고 하면서 저에게 전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왠지 자꾸 의심이 생겨 전도관에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생들은 참 열심이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 집이 있는 을지로 6가에서 원효로 구제단까지 먼 거리를 걸어서 새벽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동생들의 말과 행동을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직접 사실을 알아보기로 하고 원효로 구제단을 찾았습니다. 육군 중위의 신분이었던 저는 같은 부대의 장교 1명과 하사관 몇 명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는데, 가보니 준비 찬송이 한참 진행 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차고 넘쳐 창문 밖에까지 줄을 서 있어 들어갈 자리가 도무지 없었는데, 저는 안내를 보는 집사님의 인도로 특별히 목사, 장로 들이 앉아 있는 단상 위로 올라가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곁에서 뵙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단상으로 나오시더니 잠깐 기도하시고는 설교를 시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도관에 가면 송장 썩는 냄새가 나다가 이슬성신이 내리고 향취가 난다는 소문 때문에, 설교 말씀보다는 무슨 전기 장치 같은 것을 해 놓고 조작하지 않나 의심하며 강대상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장치는 없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설교를 40분정도 하셨는데, 제가 다른 기성교회에서 들었던 목사의 설교와는 다르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또 예배 도중에 하나님과 서너 차례 눈이 마주쳤으나 그때마다 저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곤 했습니다. 왠지 똑바로 쳐다보기가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전도관에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백찬숙 권사(74세,서울 대방교회)는 원효로 교회에서 하나님의 권능으로 병 고 침을 받고 믿게 되었다.

`아픈 몸으로 몇 개월 지내던 중 1956년 봄 어느 날 큰 시누이로부터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큰 시누이가 하는 말이, 원효로에 전도관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병자들이 다 낫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듣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큰 시누이를 따라 원효로 전도관에 갔습니다.
전도관에 가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붙어 앉아 있는데도 답답한 느낌이 전혀 없고 어디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시원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시원한 바람에 가슴이 상쾌해지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찬송을 하고 설교를 다 하신 후 하나님께서 `병 나으신 분은 모두 일어나십시오.` 하시니 여기저기에서 병자들이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다 나았다고 하고, 벙어리였던 사람도 일어나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예배가 끝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쉬엄쉬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처럼 새로 나온 사람들을 열심히 다니게 하기 위해 서로 짜고 병 나았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생기기도 했고, 또 ‘오늘 나에게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직 믿음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아무튼 나도 열심히 전도관에 다녀봐야 하겠다.’ 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너무나도 좋은 냄새가 제가 걷고 있는 그 큰길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나는 냄새일까?’ 하는 생각에 이상하여 고개를 둘레둘레 돌려보았지만 그곳에는 저 혼자뿐이었고 그런 좋은 향기가 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슨 냄새가 그렇게 향기롭고 좋은지 이 세상에서 처음 맡아 보는 향기였습니다. 그 향기를 맡으니 가슴이 시원해지며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저는 그때 맡았던 향기가 향취 은혜였다는 것을 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기를 결심했던 저는 그 다음 날부터 새벽예배에 나갔는데, 조금만 걸어도 쉬었다가 가야 했던 제가 어떻게 그런 힘이 생겼는지, 문래동에서 원효로까지 1시간이 넘는 그 먼 거리를 걸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예배에 참석을 하였습니다.
못 쓰던 한쪽 다리는 전도관에 다니면서 전혀 불편이 없게 정상적으로 되었으며, 허약했던 몸도 점점 건강해져 전도관에 다닌 지 한 달쯤 지나서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