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귀한 은혜

<483회>인중애 권사(1)/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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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모래사장집회에 모인 군중 (1955. 7. 4.~7. 11.)

저는 1936년 인천 옹진군 덕적도라는 섬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섬마을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농사도 지으셨습니다. 유독 부지런하고 성실하셨던 부모님은 농사로 자수성가하셨습니다. 작은 땅에서 시작해 점차 농토를 늘려나가 천마지기의 논밭을 일구시며 저희 남매를 유복하게 키우셨습니다.

덕적 소학교를 졸업하고 어느덧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여성 교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이었고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도 유교의 남녀유별 의식을 지니고 계셔 여자는 공부를 많이 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굉장히 적극적인 성격으로 알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막내 오빠가 저의 이런 마음을 헤아려 부모님을 설득하셨습니다. 결국 부모님은 오빠가 함께 가는 것을 전제로 당시 여성 실업 교육 명문이었던 인천 여자상업 중·고등학교로 진학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으며 한참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인천 여자상업고등학교 당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오른쪽이 인중애 권사)

중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가 감기 같은 열병을 심하게 앓으셨는데 그 후 나쁜 피고름이 오른쪽 귀 뒤에 차더니 주먹만 한 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원인도 모르니 치료 방법도 없어서 쑥 뜸질 같은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다 상처만 깊어졌고 몇 년을 꼬박 누워 계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전갈을 받았습니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저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사람은 왜 죽는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부흥회며 절을 찾아다니며 죽음과 인생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확실한 답을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한강 모래사장집회에서 찾은 기쁨
1955년 뜨거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장안의 화재였던 박태선 장로님 집회가 서울 한강 모래사장(1955. 7. 4.~7. 11.)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친구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길로 찾아가게 된 집회장은 어마어마한 규모와 사람들로 대단했습니다. 그곳에는 벽보에서 보았던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집회장의 중간쯤에 앉아 한참을 예배를 드리는데 박 장로님께서 우렁찬 목소리로 “병자들은 일어나라!” 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때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 쳐다봤더니 제가 앉은 쪽에서 20미터쯤 거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본인이 목사임을 밝히고는 얼굴 쪽을 만지며 커다란 혹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기뻐 뛰었습니다.

눈앞에서 기적 같은 일을 목격한 저는 놀라움과 동시에 그간의 괴롭고 고민되던 마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온갖 물음에 대한 확실한 답을 줄 만큼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박 장로님 집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참석했습니다.

간절히 원할 때 보내 주시는 은혜
그 후 인천 동산중학교 운동장에서 집회(1955. 9. 16.~9. 22)가 열렸습니다. 폭우 속에도 동산 중학교 앞 넓은 벌판에 펼쳐진 천막 집회장에는 저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자리 잡고 앉은 저는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박 장로님께서 나오셔서 “마음문 여세요”라고 말씀하시며 강대상을 ‘탁’ 치셨습니다. 그 순간 강대상에서 사람들에게로 빛이 뻗어 나오는데 그것은 손가락 굵기 정도 되는 세 줄기의 뽀얀 빛이었습니다.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로만 들었던 이슬 같은 은혜라는 확신과 감격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 나도 저 은혜를 받아 죄를 씻고 싶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고 눈물을 흘리며 계속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뽀얀 빛줄기가 저에게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사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또 그 빛은 사람에 따라 비켜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했습니다. 너무 신기해서 ‘왜 그럴까?’ 하고 유심히 바라보니 떠들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비켜 가고 간절히 기도드리는 사람에게는 머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은혜를 받아야 된다.”라고 말씀을 하셔서 ‘그 은혜를 주시는 분이 바로 이분이구나. 진짜구나’ 하며 무릎을 쳤습니다. 은혜는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허락해 주심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나니 평생 잊지 못할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동산중학교 운동장 집회는 말 그대로 은혜의 창파였습니다. 환자들 속에서 예배를 봤던 저는 피고름 냄새가 아닌 사과향, 꽃향 등 가지각색의 향기로운 냄새가 맡아져 신기했습니다. 그 향기는 집에 가서도 일주일 동안이나 진동을 했는데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중애 권사/ 기장신앙촌

갖가지 모양으로 내리는 이슬성신
한 번은 전주 집회에 참석해서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강대상을 치실 때마다 이슬처럼 뽀얀 성신이 기가 막히게 뿜어져 나오는데 박 장로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는 박 장로님께서 타고 올라가시는 기차를 저도 타기 위해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이정길 목사와 함께 걸어오시는 것을 봤는데 어느 순간 박 장로님 얼굴이 안개 같은 것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옆에 있던 이정길 목사 얼굴은 아무렇지 않은데 ‘내가 잘 못 봤나?’ 하고 다시 보니 박 장로님 얼굴 주변에서만 이슬이 계속 뽀얗게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해가 창창히 떠 있어서 비나 안개가 아니었고 그것은 이슬성신 은혜임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천 전도관 낙성집회 때의 깨달음
천막 집회에서 은혜받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각 지역에 전도관을 개관했습니다. 1956년 인천 전도관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개관을 했는데 계속 늘어나는 교인들을 다 수용하지 못하게 되어 그해 신축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인천 전도관 개관 때 부터 다니며 교인들과 함께해 왔기에 모두 힘을 합쳐 공사 현장에 나가 벽돌도 나르고 질통을 지고 시멘트와 모래 섞은 것을 나르기도 하며 제단 건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신축공사를 시작한 지 약 2개월만인 12월 28일 인천 전도관 낙성 집회를 성대히 치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봉사대원으로 집회에 참석하신 분들을 위해 물을 길어 나르고 안내하며 바빴지만, 그날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많은 이슬은혜가 소낙비처럼 쏟아졌고 눈 모양으로 흩날리기도 하고 거기에 갖가지 향기까지 나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은혜 속에 철야로 예배를 드렸는데 날이 어두워질수록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제 옆에 있던 사람도 추운지 담요를 덮었는데 저는 예배를 드릴수록 불덩어리가 들어온 것처럼 등허리가 뜨끈뜨끈해 무얼 덮지 않았는데도 추운 줄 몰랐습니다.

집회 내내 귀한 은혜를 체험하니 하나님이 이곳에 계심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은혜를 받은 바가 너무도 확실했기에 믿고 따르는 것에 주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 고향 덕적도에서의 전도
인천 전도관 낙성집회를 마치고 전도관 식구들은 전도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저도 하나님 은혜를 전해서 목사들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다 전도하겠다고 작정하고 고향으로 한달음에 내려갔습니다. 제일 먼저 집으로 가서 가족들에게 그간 전도관에 다니며 은혜받은 이야기를 전하니 어머니는 물론 큰 오빠께서도 놀라워하셨습니다. 다음날부터 저는 신나게 동네 친구며 동생들을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찾아온 덕적교회 장로들은 저에게 “왜 사람들을 박 장로한테로만 데려가냐”며 비방하고 방해하며 야단이었습니다. 이런 방해 속에서도 80명이라는 수가 모였는데 예배드릴 곳이 없었습니다. 사정을 아시게 된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서 예배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힘차게 전도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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