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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으며 일하는 시간 되었나 매일 돌아봐

안병화(3) / 기장신앙촌

한번은 질통에 사모래를 진 적이 있었는데 꽤 무거워 높은 데까지 올라가려면 한 번씩 쉬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질통을 지고 올라갈 때 순간 누가 뒤에서 받쳐 줘서 하나도 무겁지 않았습니다. 고마운 분이구나 싶어서 “누구세요?” 하며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쳐 주셨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이 죄인도 이렇게 […]

이슬성신을 내리는 존재가 감람나무

안병화(2) / 기장신앙촌

이듬해 봄에는 박 장로님께서 부산 대신동에 전도관을 세우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주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사람들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모인다고 했습니다. 같이 제일교회에 다녔던 언니(안병애 권사, 현재 기장신앙촌 소속)는 그때부터 대신동전도관에 나가기 시작했고, 저에게 기성교회는 구원이 없다며 전도관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긴 했지만 언니의 말이 크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

마음과 생각으로 지은 죄까지 하나님 앞에 다 회개하라

안병화(1) / 기장신앙촌

저는 1937년 평안남도 중화군 풍동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동네에서 부자 소리를 들었고, 집안일 하는 사람을 여러 명 두고 살았습니다. 장로교인이셨던 부모님은 일요일이면 깨끗하게 차려 입고 평양 시내에 있는 장로교회에 나가셨습니다. 그 후 이남에 내려와 포항에서 상회를 할 때 6·25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맨손으로 피난 갔다 포항에 돌아와 보니 집과 상회는 잿더미가 돼 […]

지금 이 순간 맑게 사는 것이 가장 귀하다는 생각으로

백태신 승사(3) / 기장신앙촌

그 후 하나님께서는 경기도 부천에 신앙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수십 개의 공장부터 유치원과 학교, 예쁜 주택과 예배드리는 제단까지 속속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으며 저희 식구들은 신앙촌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때 부모님과 오빠, 올케언니와 어린 조카가 같이 살았던 저희 가족은 소사신앙촌에 주택을 미리 구입해 두었습니다. 살고 있는 집이 팔리면 신앙촌으로 이사하려고 기다리는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추운 […]

무슨 일이 있어도 요동치 않고 이 길을 따라가리라

백태신 승사(2) / 기장신앙촌

하루는 박 장로님께서 윤치영 장관 댁에 가셔서 사람들에게 안찰해 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윤 장관은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후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전도관에 열심히 나온다고 했습니다. 저도 안찰 받고 싶은 마음에 그 댁을 찾아갔더니 응접실에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앞사람이 안찰 받을 때 보니 박 장로님께서 눈과 배에 손을 살짝 대시며 […]

‘목사는 하나님의 향기를 전혀 모르나 보다’

백태신 승사(1) / 기장신앙촌

193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저는 사업가이신 아버지를 따라 중국 톈진과 베이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8·15 해방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가회동에서 살았는데 장로교인이셨던 어머니는 집과 가까운 안동 장로교회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당시 안동교회는 윤보선 의원을 비롯한 사회 저명인사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 목사 딸과 친구로 지내며 성가대도 하고 교회 활동에 재미를 붙이게 됐습니다. 그 […]

날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이복례 (3) / 기장신앙촌

강화도에서 소사신앙촌으로 돌아온 후 김 권사님 가족들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서울에 나가게 됐습니다. 그래도 저는 신앙촌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며 지냈지만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시고 공장이 멈추는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나왔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께서 옥에서 나오셔서 더 힘차게 덕소신앙촌을 건설하시고 소사에 있는 사람들이 덕소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부러울 수가 […]

전도관 다니며 웃는 일 많아져 ‘여기 오니 이렇게 편안하구나!’

이복례 (2) / 기장신앙촌

이만제단에 다니면서 저는 “요새 좋은 일 있어요?”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항상 표정이 없던 제가 자주 웃는 것을 보고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여의고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저는 몹시 외로웠습니다. 한겨울 시냇물에 빨래할 때면 재잘거리며 학교 가는 또래들을 바라보다 ‘왜 난 엄마가 없을까.’ 하며 꽁꽁 언 손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

사람들이 병이 나았다고 외칠 때마다 집회장에는 환호소리가 넘쳐

이복례(1) /기장신앙촌

저는 1938년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現 구리시 수택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이 되기 전에 부모님을 여의고 언니들 손에서 자란 저는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결혼한 큰오빠네 집에 얹혀살다가 전주로 입양됐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 집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 후 열여섯 살부터 남의 집 살이를 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부모 없이 막되었다는 핀잔을 듣지 않으려고 항상 […]

아름답고 성결한 마음 주시기를 오늘도 기도 드려

김장예 집사(3) / 기장신앙촌

당시 신앙촌 캐러멜과 카스텔라는 맛있기로 유명해서 인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약속한 공급량을 맞추기 위해 공장에서는 시간을 아끼며 생산했는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제과 공장 사람들을 부르셔서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쁘게 일하는 중에도 자유율법을 지킬 것을 당부하시며 마음과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는지 항상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유율법에 비추어 합당한 모습이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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