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안짓고 살다가 기쁨으로 하나님을 뵙고 싶을 뿐

방한열 권사 / 덕소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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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지난호에 이어서 당시는 하나님께서 옥중에 계실 때로, 소사신앙촌 하나님 댁에 있는 우물에 영적으로 축복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물을 받아 와서 매일 아침마다 마셨는데,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숨이 차는 증상이 점점 없어지면서 창백하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았습니다. 건강을 완전히 되찾은 저는, 오만제단 터 닦는 곳에서 하루종일 돌을 나르며 일을 도와도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신 중에도 가지들을 염려하셔서 영적으로 축복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것을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생은 신앙촌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신앙촌 소비조합 하며 하나님 가르쳐주신 큰 자산은 ‘정직’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이 복을 받으며 살아왔나 감사할 뿐

1960년 3월, 하나님께서 옥에서 나오시던 그날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에 도열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맞이했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도 되지 않는 죄목으로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셔야 했지만 목메어 기다리는 가지들을 위해 1초도 쉬지 않으시고 오만제단에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뵈면서 ‘우리들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시는구나.’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기 전부터 신앙촌 물건을 판매했던 저는 신앙촌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간장을 몇 통씩 들고 인천에 가서 팔았는데, 시온 간장이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어찌나 인기가 좋았는지 동네 주부들이 다 몰려와서 몇 시간도 안 돼 간장이 다 팔리곤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고객에게 소사신앙촌에는 ‘주인 없는 상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상점은 돈을 받는 사람이 없이 물건을 산 후 각자 계산하는 곳으로, 나간 물건과 들어온 돈을 맞춰 보면 1원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맞는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그분이 세상에 정말 그런 곳이 있느냐며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소사신앙촌에 모시고 왔습니다. 그 고객은 인천 신흥동에서 가구 공장을 크게 하며 부유하게 살았는데, 소사신앙촌에 반듯반듯하게 서 있는 예쁜 양옥집들을 보면서 “여기는 정말 별천지군요.”라며 놀라워했습니다.

1962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하여 소비조합을 계속했습니다. 큰 밑천도 없이 시작한 장사였지만 하나님 가르쳐 주신 대로 정직하게 장사하면서 고객들에게 신용을 얻게 되었고, 이불, 양재 등 다른 품목도 고객들이 찾으면서 점점 장사가 커졌습니다. 그렇게 소비조합을 하면서 5남매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뒷바라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앙촌에 들어오기 전 작은 집에서 비좁게 살았던 저희 가족은 덕소신앙촌에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5년, 저와 함께 덕소신앙촌에 사시던 어머니가 82세를 일기로 운명하시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신이 또렷하게 살아 있던 어머니는 잠을 주무시는 것처럼 편안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돌아가신 후 제가 생명물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 드렸더니,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고 들어가서 한 대접을 다 넣어 드렸습니다.
다음 날 장례반이 와서 시신을 생명물로 씻겼는데, 피부가 뽀얗게 피어나고 주름살이 다 펴져서 참 고운 모습이셨습니다. 외사촌 오빠와 언니가 그 모습을 보고는, 어쩌면 주름살 하나 없이 저렇게 예쁘실 수가 있느냐며 감탄했습니다. 이 길을 알고 한결같이 신앙생활을 해 오셨던 어머니는 미소를 머금은 듯 평안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로 함께해 주셨기에 아름답게 피어서 가셨습니다.

지금 저는 덕소신앙촌에 새롭게 재건축된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매일 눈을 뜨면 깊고 조용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이런 복을 받으면서 살아왔는지, 생각할수록 감사의 기도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새벽예배 시간에 저는 제 자식들이 진실한 천부교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자식들과 그 가족까지 하나님 앞에 찬송드리는 날이 오도록 쉼 없이 기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이 길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제 여동생 한식이가 떠오르곤 합니다.

동생은 1990년에 골수암으로 숨을 거뒀는데, 눈을 감기 직전에 “언니, 나 신앙촌 산에 묻힐 수 없을까?” 하고 물었습니다. 한식이는 제단에 다니지 않았지만, 어머니와 저를 만나려고 덕소신앙촌에 올 때마다 신앙촌은 참 평안한 곳이라며 좋아했었습니다. 그런 동생이 마지막 가는 길에 정든 고향도 아니고 선산도 아닌 신앙촌에 묻히고 싶다고 했던 말은 오랫동안 제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신앙촌에서 무엇을 느꼈기에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진작 전도를 했더라면, 그래서 동생이 그 귀한 은혜를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따라왔고 누가 뭐라 해도 진리인 이 길을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전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저는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건강을 허락해 주셔서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어떻게 하면 죄를 안 지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맑고 깨끗하게 살아서 그날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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