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생활속에서도 근심 걱정은 마음에 조금도 없어

박유봉 권사 / 청주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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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27년 충북 청주군 북일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묵방 장로교회에 다녔던 저는 일요일이면 깨끗하게 준비한 옷을 입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하여 청주에서 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남편이 군대에 징집된 후로는 제가 생계를 위해 연초제조창에 다니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1955년경 어머니가 박 장로님의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얼마 후 청주전도관에 다니면서 저에게도 같이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희 집에 자주 찾아와 간곡하게 권유하셨지만 저는 생활이 빠듯해 그럴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어머니 말씀을 깊이 새겨듣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는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이 많이 허약했습니다. 5남매 아이들을 낳아 기르면서 전쟁을 겪고 직장에 다녀야 했던 저는 출산 후에도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는데, 그 때문인지 허리를 잘 쓰지 못했고 항상 기운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서 홍역을 앓고 난 뒤로 해마다 가을이면 심한 기침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한번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는 고질적인 기침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렇게 허약한 몸으로 직장 일과 집안일을 병행하던 중, 언제부터인가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고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간신히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안일을 다 미루고 누울 수밖에 없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생계 때문에 직장을 쉴 수 없었던 저는 하루라도 빨리 기운을 차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밥을 먹고 기운을 차리려 해도 속에서 받지 않아 넘어가지가 않았고 병원에 갈 형편도 못 되니,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탔습니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아 병 나은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오르면서, 전도관에 가면 나도 몸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도관에 가자는 어머니 말씀을 흘려듣던 저였지만 제 사정이 다급해지니 제발 몸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청주전도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서른두 살 되던 1958년이었습니다.

우암산 중턱에 있는 청주전도관까지 겨우 겨우 몸을 가누며 올라가면서도 매일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새벽예배에 계속 다니던 어느 날, 너무나 향긋한 냄새가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난생처음 맡아 보는 향긋하고 좋은 냄새는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였고, 신기하게도 길을 걸을 때나 방에 있을 때나 계속해서 진동했습니다. 그전에 어머니가 ‘향취 은혜’에 대해 이야기하시던 것이 떠오르며, 이 향기가 바로 향취 은혜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향취 은혜는 순간순간 새로운 향기로 바뀌는 것이 너무나 신비로웠습니다. 그 향취 속에서 제 마음도 자꾸자꾸 새로워지는 것 같았고 기쁨과 즐거움이 매일 매일 마음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렇게 청주전도관에 계속 다니면서 저는 점점 기운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워낙 몸이 약했던 저는 아침 일찍부터 일곱 식구 식사 준비며 출근 준비를 하고 직장에서 작업을 하면 힘이 없고 어지러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청주제단에 다니면서부터 몸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지며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예배를 다녀오면 시간이 빠듯해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는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몸이 가뿐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해마다 가을이면 시작되던 고질적인 기침도 언제 나았는지 감쪽같이 사라져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도 기침을 전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20년 가까이 고생해 온 기침이 깨끗하게 사라지니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하루는 새벽예배에 다녀와 바쁘게 아침 준비를 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향취가 맡아지는데 머리 위에서 물을 쏟으면 “쏴아~” 하듯이 향취가 머리 위에서 쏟아 붓는 것처럼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아는 놀라운 그 은혜 하늘나라 즐거움이 매일 새롭도다~” 그 찬송이 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아 하루 종일 부르고 또 부르면서, 참으로 복된 길을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남편이 사업을 하다 빚을 많이 져서 살림이 무척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제가 직장에 다니며 살림에 보태긴 했지만 5남매 아이들이 한창 클 때라 한 끼니를 때우고 나면 다음 끼니가 막막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제 마음에 근심 걱정은 조금도 자리 잡지 못했습니다. 매일 매일 지속되는 향취 은혜와 차고 넘치도록 즐거움을 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청주제단에 다녔던 아이들도 하나같이 학교생활을 잘하며 밝은 성격이었고, 약 한 봉지 먹을 일 없이 건강하게 자라나 저는 늘 감사를 드렸습니다.

1970년경 여동생과 함께 덕소신앙촌에 사시던 친정어머니께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가 보니 어머니는 주무시는 듯 너무나 편안한 모습이었고 오히려 생전보다 피부가 뽀얗고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먼저 와 계셨던 이웃 분들이 하는 말이, 서울에서 기성교회에 다니는 저희 큰언니가 왔었는데, 언니가 “어머니!” 하고 부르며 오른쪽 팔을 잡았다가 놓자 그 부분에 푸르스름한 손자국이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큰언니는 내일 다시 오겠다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팔을 보았더니 정말 도장을 찍어 놓은 것처럼 푸르스름한 색깔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장례반 권사님이 오셔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셨습니다. 생전에 핏기 없이 창백했던 어머니 입술에 루주를 발라 놓은 것처럼 발그스름한 핏기가 감돌았고 전날보다 더 뽀얗게 피어나 일흔이 넘은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나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온몸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노긋노긋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오른쪽 팔에 도장을 찍은 것같이 선명하게 있던 손자국도 생명물로 씻기면서 점점 옅어졌습니다. 곱게 핀 어머니를 보며 저는 생전에 저를 전도하실 때 간곡하게 권유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딸에게 참길을 알게 하려고 그토록 애타하셨던 어머니. 하나님을 알게 된 후로 변함없이 이 길을 따르셨던 어머니는 귀한 은혜 속에 아름답고 평안하게 가셨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어려움 속에서 낙심되고 슬플 때 더 큰 은혜로 위로와 용기를 주셨던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그 은혜 속에서 제 영혼이 평안했음을 절실히 느끼며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하는 찬송이 그냥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 마음속 깊이 불러 봅니다. 주신 은혜를 다 표현하기에는 어떤 말로도 부족할 뿐이지만 저는 오늘도 찬송을 부르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 은혜 영원토록 저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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