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구걸할 수는 없다

이지수 / 명지대 북한학과 주임교수
발행일 발행호수 2346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이지수 / 명지대 북한학과 주임교수

만일 북한도 나라라고 한다면 참 이상한 나라다. 문제는 그 이상한 나라가 바로 우리와 같은 민족이면서 이웃에 붙어있다는 점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무력 도발, 공격이 반복되는데도 여전히 대화가 부족하다느니 자극하면 안 된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북한이 핵무장을 지속하고, 민가를 포함해 연평도에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는데도, 결국 잘못은 우리 정부에 있다는 얘기는 웃고 넘기기엔 너무 섬뜩하다.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사회주의 체제중에서도 대단히 이상한 체제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첫째, 이 나라의 독재자는 전혀 국민을 신경 쓰지 않는다. 국민이 자유롭게 선거에 출마하는 제도가 없는 것은 물론 정부나 정치권력을 비난하는 언론도 없다. 인터넷이나 네티즌이나 시민단체나 반정부 운동권도 없다. 그러니 여론이란 것도 존재할 리 만무다.

둘째, 이 나라의 독재자는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은 그 왕조를 위한 부수품 쯤으로 여긴다.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배급에 의존한다. 배급이란 통제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배급이 끊기면 도대체가 살 길이 막막해진다. 북한은 결국 나라 전체가 형무소이던지 혹은 전쟁을 대비한 일종의 병영이라고 보면 딱 맞다.

셋째, 사회주의체제에서는 특히 권력의 상층부일수록 최고 권력자에 대해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복종적이다. 가령 왕조국가의 정승들은 정승 직을 그만두어도 돌아 갈 자기 땅이 있고, 노비가 있고, 또 전답도 있다. 그러므로 기분은 좋지 않겠지만 관직을 그만두는 것을 두려워 할 것까지는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 북한의 경우는 어떨까? 정무원 총리가 직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정무원 총리에게 배당된 집을 비워주어야 하고(전 국민이 이를테면 관사 혹은 사원아파트에 사는 셈으로 개인 명의로 등기된 부동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배정되던 관용차량이 사라지고, 운전기사도 사라짐을 뜻한다. 정기적으로 배급되던 각종 의식주 관련 혜택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그들의 최고권력자에 대한 복종이란 오죽하겠는가?

이런 특징을 가진 북한의 권력은 조국통일의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전 국민을 통제하고 억압을 정당화한다. 전시니까 이 모든 것이 통한다는 논리다. 그러므로 그들에겐 한반도의 긴장이 항상적으로 필요하다. 평화가 영구화되면 어떻게든 이를 깨어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 유지되는 권력이다. 그들에게 평화정책은 어떤 의도에 의한 임시적인 정책이지 결코 일반정책이 아니다. 그러니 북한과 대화하자는 것은 결국 그들의 의도에 넘어가는 것이다. 자기 이익만 챙기고 협상장을 떠나거나, 의도가 충족되지 않으면 바로 협상을 깨고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가곤 한다.

이런 이웃을 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평화를 구걸할 것이 아니라 힘을 키워 저들이 넘볼 틈을 주지 말아야한다. 저들과 대화를 통해서 무언가 우리가 얻는 것이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 우리 힘을 키워나가는 동안 북한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무너질 것이다. 이미 벌써 무너질 권력이 지금껏 버티는 것도 다 우리에게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폭력배에게 몽둥이가 필요한가, 대화로 구걸하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 보수와 진보 좌파간 논란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