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집회에서 철야를 했는데도 피곤치 않고 몸은 날아갈 듯

최영옥 집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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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오른쪽) 대구집회 (1955. 6. 9.~6. 16.)

저는 1930년 평안남도 안주군 입석면의 시골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평범한 농가였던 저희 집은 온 가족이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며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 나이 스물한 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오빠네 가족까지 열두 명의 식구가 피난을 떠났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에 꼬박 두 달 동안 산길을 걸으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몹시 고생을 했습니다. 폭격이 쏟아지는 피난길에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인생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전에서 어렵게 피난 생활을 하던 저희 가족은 얼마 후 부산 대청동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부산에 자리를 잡으셨던 작은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장사를 하면서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1955년 5월이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요즘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부흥집회가 열린다며 함께 가 보자고 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그분은 남편이 장로 직분을 맡고 있어서 장로 부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녀 본 적이 없어서 집회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분이 열심히 권유하시는 것을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동네에서 저와 친하게 지내던 봉녀 언니(故 임봉녀 집사)에게 이야기했더니 언니도 집회에 가 보고 싶다고 하여 같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아 놓은 집회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키가 훤칠하신 분이 등단하시자 아주머니가 저분이 박태선 장로님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그 많은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는데, 저는 찬송가를 몰라서 따라 부르지 못하고 주변 사람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손뼉을 치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느껴지고 흙먼지가 날리는 집회장에 있는 것이 불편하여 예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주머니가 또 집회에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은혜를 받는 사람이 많다면서 한 번 더 가 보자고 간곡하게 권유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승낙을 했습니다. 전날 같이 갔던 봉녀 언니도 함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말문이 열렸다는
벙어리 청년에게 마이크 대주자
어눌한 말투로 말을 따라 하는
광경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

그날 예배 중간에는 사람들이 단상에 올라가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중에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청년도 있었는데 원래 벙어리였던 청년이 박 장로님 집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말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마이크를 대 주시며 “엄마, 아빠”를 해 보라고 하시자 청년은 조금 어눌한 말투로 “어-엄-마-, 아-아-빠-” 하며 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저는 ‘세상에 벙어리가 말을 하다니!’ 하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불러 보는 찬송가였지만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닿아
계속 불러도 또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집회장을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를 때 그 소리가 주변 산에 울려 멀리까지 메아리 쳐

박 장로님께서 한 가지 찬송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부르셨기 때문에 저는 점점 가사를 익히게 되었고, 어느새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전날 집회에 참석했을 때는 예배 시간이 소란스럽고 지루하게만 느껴지더니 그날은 웬일인지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난생처음 불러 보는 찬송가였지만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아 계속 불러도 또 부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회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찬송을 부를 때 그 소리가 주변의 산에 울려 멀리까지 메아리쳤습니다.

찬송 계속 부르고 싶어 철야
찬송 하면서 은혜 받은 목사들
이야기 들으며 밤을 꼬박
새웠는데 전혀 피곤치 않고
날아갈 듯 몸은 가벼워

찬송을 계속 부르고 싶은 마음에 저는 집회장에서 철야를 하게 되었고 봉녀 언니도 함께 남았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도 집회장을 떠나지 않고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철야를 하는 동안 목사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라가 찬송을 인도하고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르고 체험담을 듣다 보니 어느새 날이 환하게 밝아 왔습니다.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오히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며 잠시도 집회장을 떠나기가 싫어서 저와 봉녀 언니는 집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철야를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6월에는 대구에서 박 장로님 집회가 일주일 동안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봉녀 언니와 함께 대구로 향했습니다. 완행열차를 타고 대구역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밤이 깊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집회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열리는 칠성동 백사장에 가까이 가자 우렁찬 찬송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고요한 밤하늘에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이 울려 퍼질 때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에 집회장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갔습니다.

(최영옥 집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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