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단에 임하시는 성신의 불을 보고 소방차가 출동하기도

최안심 권사(2) / 덕소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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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집회장 곳곳에는 병자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제 앞쪽으로 다리가 불편한 20대의 젊은 아가씨가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는 한쪽 무릎이 꺾인 채로 펴지지 않아서 잘 걷지 못했으며, 한쪽 다리는 정상이었지만 접혀진 다리는 뼈와 가죽만 있을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서 보기에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설교하시던 박 장로님께서 집회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병 나은 자는 다 일어나라!” 하고 외치시자, 그 아가씨가 아픈 다리를 후들후들 떨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내 다리가 펴졌어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접혀 있던 다리를 곧게 펴고 정상인과 똑같이 이쪽저쪽으로 걸어 다녔습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아주 얌전했던 아가씨가 얼마나 기뻐하며 좋아하던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습니다. 그 아가씨뿐만 아니라 “벙어리가 말을 합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됐습니다!” “아프던 팔이 나았습니다!” 하고 저마다 외치는 속에서, 저도 손을 번쩍 들고 “저도 병이 나았습니다!” 하고 크게 외쳤습니다. 매일같이 기운 없이 병석에서 누워 지냈던 제가 박 장로님 집회에 와서 씻은 듯이 나은 것이었습니다. 병을 고쳐 주신 박 장로님께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여 저는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그 집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참석한 저는 이후부터 박 장로님 댁 뒷마당에 세워진 원효로 구제단(서울 임시 중앙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원효로 구제단에 예배드리러 갔을 때, 뜻밖에도 거기서 언니(현재 기장교회 최안순 권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경기도 군포에서 살았던 언니는 10년 넘게 음식을 제대로 못 먹고 종종 심한 복통을 앓았는데,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봐도 특별한 병명이 나오지 않아서 쇠약한 몸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니를 원효로 구제단에서 만났을 때는 정말 못 알아볼 정도로 건강해진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언니가 사는 동네에 무당이 있었는데 그 무당의 남동생이 벙어리였다고 합니다. 군포의 어느 장로교회 목사가 그 벙어리를 데리고 하나님의 한강 모래사장 집회에 참석했는데, 놀랍게도 집회 3일째 되는 날에 그 벙어리의 말문이 트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신기한 이야기를 들은 언니는 ‘혹시 나도 병이 나을 수 있을까?’ 하여 쇠약한 몸을 추슬러서 군포에서 서울까지 오가며 원효로 구제단에 다니게 되었고,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밥도 잘 먹고 복통도 다 나아서 이렇게 건강해졌다고 했습니다. 언니와 저는 그동안 구제단에 다녔으면서도 예배 시간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몇 달이 지난 후에야 서로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오래도록 앓던 병이 깨끗이 나은 언니는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어린 딸을 데리고 원효로 구제단에 갔을 때였습니다. 한창 예배를 드리던 중에 별안간 제단 바깥에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불이야! 제단에 불이 났어요!”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연거푸 들려오자 예배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저는 어린 딸이 곁에 있어서 금방 나가지 못하고 조금 후에 밖으로 나갔는데, 소방차도 와 있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대고 있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불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인에게 어디서 불이 났냐고 물었더니, 구제단의 지붕을 가리키면서 방금 전까지 저 지붕 위에 커다란 불덩어리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신의 불이 내린 것을 보고 화재가 났다고 신고해서 소방차가 출동했는데, 소방대원들도 불성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도 교인들끼리 모일 때면 불성신을 보고 소방차까지 출동했던 그때 상황이 화제가 되어서 서로서로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저희 남편은 원래 제단에 다니지 않았다가 1962년에 가족 모두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후부터는 오만제단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온 나라가 궁핍했던 시절이라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남편이 신앙촌의 간장 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생활이 점점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언제부터인지 가정에 점점 소홀해지더니,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후에는 급기야 모아 둔 돈까지 전부 가지고 나가 버려서 당장 먹고살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그때까지 집에서 살림만 했던 저는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가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아무리 궁리하고 고민해 봐도 길이 보이지 않아 근심과 괴로움에 빠지게 되었고 ‘앞으로 아이들과 어떻게 살아가겠나. 차라리 내가 세상을 떠나면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거두어 주겠지.’ 하는 절망적인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서 한참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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