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기쁨의 은혜”

울산교회 이형례 권사 신앙체험기 (1)
발행일 발행호수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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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회> 이형례 권사/울산교회

저는 1943년 전라북도 김제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위로는 오빠가 둘, 아래로는 여동생이 셋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께서 쌀장사를 하시며 저희 6남매의 생계를 꾸려 나가셨습니다.

저는 17살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를 대신해 빨래도 하고, 쌀로 죽을 끓여서 동생들 식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홀로 자식들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는 무척 엄격하셔서 날이 조금만 어두워져도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다 1959년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던 큰 오빠가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오빠는 집에 오자마자 눈을 반짝거리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1955년 당시 20살이었던 큰 오빠는 일자리를 구하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한강 모래사장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곳에서 박태선 장로님이 예배를 인도하시면 수많은 병자들이 치유되는 많은 기사이적을 목격했고, 벙어리가 말문이 열려서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것도 직접 봤다고 했습니다.

큰오빠는 정말 훌륭하신 분이 한국 땅에 나타나셨다며, 우리 가족도 앞으로는 박태선 장로님이 세우신 전도관을 다녀야한다고 힘주어 이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포함한 저희 가족들은 종교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큰오빠는 저에게 꼭 전도관에 가야한다고 단단히 일러두고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오빠가 떠난 뒤에야 전도관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큰오빠가 꼭 가야 한다고 말했을까 궁금해서, 그 주 일요일에 세 살 된 막냇동생을 업고 전도관에 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곳에는 아담한 건물에 김제전도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전도관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마냥 웃음이 났습니다. 혼자 웃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까 봐 입을 막고 웃으며 예배를 마친 저는 전도관은 기분 좋은 곳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 다음 주에 친구들을 데리고 전도관에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친구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자꾸만 마음에 기쁨이 넘쳐서 웃음이 난다고 했습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저희를 보고 관장님은 이제 웃음보따리는 내려놓고 찬송의 뜻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불러보자고 하셨습니다. 천천히 가사의 뜻을 떠올리며 찬송을 부르니 마음에 큰 감동과 평안함이 찾아왔고, 이를 계기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생겨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신 생명물에서 백합꽃 향기와도 같은 진한 꽃향기가 확 퍼져나오고
생명물을 마시고 나면 목에서부터 배속까지 시원해지고 기쁨이 흘러넘쳐 미소가 지어져
은혜를 받고 나니 마음이 즐거워서 친구에게도 이 기쁨을 알려주고 싶어서 전도하게 돼

새벽에 전도관에 가면 예배가 끝난 후 관장님께서 물을 한 컵씩 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생명물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물은 축복을 받아서 그런지 기름처럼 매끈매끈해 보였습니다. 신기한 것은 물에서 백합꽃 같은 향기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향기가 진동을 하는지 떨어진 물 한 방울에서도 참기름 냄새가 확 퍼지는 것처럼 강한 꽃향기가 퍼져 나왔습니다.

또 생명물을 마시고 나면 목에서부터 배 속까지 시원해지고, 기쁨이 흘러넘쳐서 입에서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금세 다시 전도관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세 살배기 동생을 업고 다시 전도관에 가서 기도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전도관 가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저는 친한 친구도 이 기쁨을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옆집에 사는 친구를 전도해서 새벽예배를 함께 갔습니다. 새벽마다 그 친구네 집 앞에서 “영하야! 빨리 가자!” 하면 친구는 금세 일어나 준비하고 나왔습니다. 집에서 김제전도관까지 가려면 학교를 지나 공동묘지도 지나가야 했는데, 저희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별을 보며 제단에 가는 일이 즐겁기만 했습니다. 새벽마다 전도관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저희 어머니는 다 큰 여자애들이 새벽에 돌아다닌다며 야단치셨지만,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전도관에 꼭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그 무렵 전도관 밴드부가 김제 시내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전도관에서 밴드부가 조직되어 전국적으로 돌며 대대적인 전도활동을 했습니다. 큰 소리로 북을 치며 “감람나무 이겼네”하는 노랫소리가 김제 시내에 울려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곤 했습니다. 저도 그날 밴드부를 따라다니며 큰 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장님께서 제게 전도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위해 모여 사는 소사신앙촌에 입주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망설임없이 가겠다고 대답했으나, 문제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혼자 신앙촌에 가겠다고 하니 시집도 안 간 딸을 어디로 보내냐며 무척 반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의 결심은 확고했기에 어머니를 설득해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60년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저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안수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서 하나님께 안수를 받았고, 저도 떨리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하나님께서 손으로 머리를 탁탁 쳐주시는데 마치 솜뭉치로 치시는 것처럼 포근했습니다. 안수를 받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도 편하고 기뻐서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기쁨의 은혜라는 것을 그때 정확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사신앙촌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고, 그때 건설대로 지원하여 덕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건설대가 하는 일은 아파트와 공장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건물의 토대가 되는 기둥을 세우기 위해서는 땅을 파내려 가야 했는데, 지반이 단단한 곳은 조금만 파도 되지만 지반이 무른 곳은 단단한 곳보다 3배는 더 깊게 파야 했습니다. 또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가 모래를 가득 싣고 돌아와서, 모래와 시멘트, 자갈, 물을 비율대로 섞어서 콘크리트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돌 지게를 나르다가 어깨가 지게 끈에 쓸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어깨에 축복을 해주시니 고통이 싹 사라지는 체험도 했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니 저와 동료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웃으며 재미나게 일했던 기억이 납니다.

덕소신앙촌이 완공된 후 저는 제강공장에서 몇 년간 근무하다가 1970년 기장신앙촌 건설을 위해 또 한 번 건설대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1960년대 덕소 한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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