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실 때 기쁜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어
최재연 퇴임관장(1) / 기장신앙촌저는 태어났을 때 몹시 병약해서 소아과 의사이신 아버지께서도 살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낙담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졌을 때 폐병을 앓으셨기 때문인지 저는 폐와 기관지가 약하고 해수병을 달고 살아서 천방지축 뛰어 놀 나이에도 언덕을 오를 때 숨이 차서 한참 쉬었다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때 살았던 서울 흑석동 2층 집은 연탄 보일러였는데 연탄가스를 조금만 맡아도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니 여동생은 아침마다 “엄마! 언니가 또 죽었어!” 하고 소리쳤습니다. 중학교 진학할 때 아버지가 건강이 더 나빠지면 공부도 못하니 1년을 쉬라 하셨지만 저는 쓰러져도 다니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입학을 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이던 1958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하시는 하나님 바라보고 있는데
강대상을 탕탕 치시자 불덩이가 나와
가슴팍에 떨어져 뜨거워 견딜 수 없어
뜨거움 가시자 목으로 단물이 넘어와
당시 저는 부모님을 따라 원효로제단을 거쳐 마포 이만제단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원효로제단과 이만제단은 박태선 장로님께서 세우신 교회였습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 말씀하시는 박태선 장로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대상을 탕탕 치시는 순간 거기서 커다란 불덩어리가 나와 제 가슴에 푹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뜨거운 느낌이 가시고 나자 입 안에 달콤한 물이 생기더니 꿀꺽꿀꺽 목으로 넘어왔고, 이튿날 학교 가서도 목으로 자꾸 달콤한 물이 넘어와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인 분들 말씀이, 예배 시간에 불이 떨어지고 뜨거움을 느낀 것은 불성신을 받은 것이고 달콤한 물이 넘어온 것은 생수가 통하는 체험이라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좋아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교 계단을 오를 때 웬일인지 숨이 차지 않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한달음에 올라가면서 ‘내가 이럴 수도 있구나!’ 하며 놀랐습니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볼품없이 말랐던 몸에 시간이 갈수록 포동포동 살이 올랐고, 어머니는 정말 예뻐졌다며 네가 은혜 받아서 사람이 됐다고 좋아하셨습니다.
저보다 먼저 아버지도 전도관에 다니면서 건강을 찾으셨습니다. 이북에서 철도병원에 근무했던 아버지는 왕진 가방 하나만 들고 월남해 서울에 병원을 열기까지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일에 파묻혀 사시느라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신다며 어머니가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열 한살이던 1955년이었는데, 마침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 가면 불치병이 낫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가 보신 것이 저희 식구가 전도관에 다니게 된 계기였습니다. 아버지는 원효로전도관에 다니며 박 장로님께 안찰을 자주 받으셨습니다. 학자 타입의 아버지는 늘 온화한 표정으로 말씀이 없으셨는데 안찰 받고 오신 날은 특히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안찰 받은 후로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와서 몇 시간씩 책을 읽어도 몸이 가볍고 좋다며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에 파묻혀 사느라
건강이 안 좋아지셨는데 하나님께 안찰 받고
하루 종일 병원에서 일하고 와서
오래 책을 읽어도 몸이 가볍다고 기뻐하셔
부모님이 매일 새벽예배 드리며 열심히 전도관에 나가시니 5남매 저희 형제들은 자연히 따라 다녔습니다. 새벽 어스름 한강 다리를 건널 때 이만제단에서 울리는 음악 종소리가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은지 천국에서 울리는 것 같았고, 예배 시간 어른들 틈에서 손뼉 치며 찬송 부를 때는 가사를 잘 모르면서도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주일학교 예배에 박태선 장로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설교 말씀을 해 주셨는데, 무슨 말씀을 들은 기억보다는 그때 분위기가 생생히 떠오릅니다. 단상을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운 아이들과 사랑이 넘치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시던 하나님의 모습은 사진으로 찍어둔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이만제단 2층 단상 옆 학생 성가대 석에서 아래층 예배실을 내려다보는데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것이 보여서 손바닥을 펼쳐 보면 손은 전혀 젖지 않아
예배 시간에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기도 해
그 후 고등학교 시절 이만제단에서 학생 성가대로 활동하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성가대 석은 2층 단상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아래층 예배실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려서 손바닥을 펼쳐 받아 보면 손은 전혀 젖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이슬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고,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사람들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폭포수 같은 성신은 이만제단 개관식 때 사진에 찍혔던 이슬성신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만 명이 앉을 수 있어서 이만제단이라고 불렸던 예배실은 매 주일 꽉꽉 들어차서 발 하나 넣고 옮길 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사람씩 머리 위에 안수하시며 지나가실 때 보면 날아가시는 것처럼 순식간이었습니다. 옆 사람끼리 무릎이 닿도록 앉아 있는 사이를 지나가자면 사람들의 발이나 무릎을 밟으실 만한데 전혀 거치는 것 없이 훌훌 날아가시는 듯한 모습에 눈을 못 떼고 바라봤습니다. 하루는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한참 바라보다 어느 순간 예배실에 뽀얀 안개 같은 것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봤습니다. 나중에는 옆자리 성가대원도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예배실이 안개에 폭 싸인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집회에서 안개처럼 뽀얗게 은혜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제가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슬비처럼 은혜가 내릴 때, 하나님께 안수를 받을 때, 뽀얀 안개 같은 성신에 싸여 있을 때 그 기쁘고 즐거운 마음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안수하시는 하나님을 보는데
예배실에 점점 뽀얀 안개가 생기더니
옆자리 사람이 안보일 만큼 짙어져
마음은 기쁘고 즐거워 표현할 길이 없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약회사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삼촌이 계시는 적십자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병명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서 다시 검사하자 백혈병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병명조차 생소해서 얼마나 심각한 병인지 몰랐는데, 건강하고 활동적이셨던 어머니가 얼마 못 사실 거라는 선고는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이북에서 맨손으로 피난 나온 후 어머니는 집안을 일으키느라 억척같이 일하셨고, 오로지 자식들 잘 먹이고 입히는 생각만 하셨습니다. 어머니 그늘 아래 부족함 없이 살던 저희 형제는 3개월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평생 병원 일만 하셨던 아버지도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준비할지 막막하신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명물로 씻기니
얼마나 곱고 예쁜지 탄성이 절로 나와
선홍색 입술에는 엷은 미소가 감돌고
피부가 환히 피어 처녀 시절 모습같아
당시 저희 가족은 집과 가까운 흑석동전도관에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 교인 분들이 찾아와 한식구처럼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장례 때 저희 가족이 입을 상복을 손수 지어 주셨고 관 위에 덮는 꽃도 밤을 새워 정성껏 만드셨습니다. 입관예배 드릴 때 힘차게 찬송하는 동안 장례반 어른들이 어머니를 생명물로 씻기셨는데, 다 씻긴 후 봤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곱고 예쁘신지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코가 오똑하고 얼굴이 갸름한 미인형이셨던 어머니는 피부가 너무 곱고 환하게 피어서 처녀 시절 어머니가 저런 모습이셨을까 싶었습니다. 루주를 바른 듯한 선홍색 입술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잃고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지만 미소 지으시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이 차차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곱고 예쁘게 핀 모습과 밝고 편안한 집안 분위기를 느끼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습니다. 아직 철부지 같았던 제가 처음으로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은혜 받은 교인끼리는 한 가족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권능을 직접 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