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짓지 말라 하신 하나님 음성을 늘 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신앙체험기 497회 나주교회 기종례 권사>
발행일 발행호수 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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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회> 기종례 권사/나주교회

1942년생인 저는 전남 광주 광산구에 있는 산속 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마을은 깊은 산중에 있어서 그런지 교회나 절이 없었고, 가족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종교를 가진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역시 신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종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전도관을 다니게 된 것은 1957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직장을 구하러 먼저 서울로 간 여섯째 언니(기연수 권사, 나주교회)를 따라 무작정 상경하였습니다. 그때 언니의 나이가 스물셋, 제가 열여섯이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배운 기술도 없던 저와 언니는 각각 다른 집의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저는 빨리 돈을 모아서 가족들과 함께 살 집도 얻고, 더 좋은 직장도 구해야겠다는 희망을 안고 낯선 서울 땅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가 대뜸 앞으로 일요일마다 전도관에 함께 다니자는 것이었습니다. 언니의 이야기는 이러했습니다. 어느 날, 언니가 일하는 집에 전도관 사람들이 심방 예배를 보러 왔다고 합니다. 언니도 자연스럽게 함께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전도관 사람들이 부르는 찬송을 들으니 눈물이 흐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기쁨이 마음에 넘치도록 차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언니는 그렇게 기쁜 적은 처음이었다며 하나님의 은혜가 전도관에 임하는 것이 확실하니 같이 다녀보자고 하였습니다. 저는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확신에 찬 언니의 말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어 함께 서울중앙전도관에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처음 가본 서울중앙전도관은 공사가 한창이어서 건물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불의 사자로 유명하신 박 장로님께서 인도해 주셨는데, 찬송을 부르던 도중 어디선가 시원한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맡으면 맡을수록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속까지 와닿는 듯한 그 향기는 신기하게도 예배 시간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향기일까?’ 그때 저는 예배실에서 진하게 맡아지는 그 향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 그것이 향취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예배를 마치고 박 장로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안찰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쭉 지켜보니 장로님께서 배에 손을 살짝만 얹으시는 것 같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프다고 발버둥 치거나 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으로 안찰을 받았는데 저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은혜를 받지 못했나 보다’하고 약간 실망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 뒤 신기한 은혜를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1957년 4월에는 서울중앙전도관이 완공되었는데,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하여 일명 이만제단으로 불렸습니다. 이만제단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대형 음악종을 도입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은은하게 들려오는 이만제단의 아름다운 음악 종소리는 참으로 듣기 좋았습니다. 예배 시간에 저는 이만제단 2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한참 찬송을 부르다가 앞을 보니 박 장로님 계신 단상 쪽에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건물 실내에서, 그것도 단상 쪽에만 비가 내리는 것이 이상해서 처음엔 잘못 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비가 떨어져도 단상이 젖거나 아래에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가 아닌 이슬은혜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이슬 같은 은혜를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전도관에 임하신다고 했던 언니의 말은 참이었고, 구원은 전도관에 다녀야 얻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은혜를 확실히 체험한 저는 지방에 있는 가족들을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에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박 장로님께서 지방 순회를 하시던 때라 운 좋게 광주전도관에서도 박 장로님이 인도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던 중 찬송을 인도하시던 박 장로님께서 박자에 맞춰 단상을 손으로 내리치셨습니다. 그러자 단상 쪽에서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불의 사자’라고 불리시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성신의 불꽃이 박 장로님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니 실로 경외감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장로님께서 인도하시는 예배에서 향취와 이슬같이 내리는 은혜를 체험했기에 저는 이분이야말로 진짜 하늘의 권능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후 저는 어머니를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얼마 뒤 어머니와 언니, 저 셋이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할 수 있었습니다.

1960년 즈음, 가족과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제과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살 집도 생기고, 바른 양심으로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기로 소문난 신앙촌 기업의 일원으로 근무하게 되니 그 기쁨과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제과 공장에서 당시 신앙촌의 인기 제품이었던 캐러멜 포장일을 맡았는데, 신앙촌 주택 그림이 컬러로 인쇄된 캐러멜 상자가 참 예뻤던 기억이 납니다. 1962년에 덕소신앙촌으로 이주하고 나서도 제과공장 캐러멜 반에서 일했는데 그때는 훨씬 좋은 자동화 기계가 생겨 캐러멜 포장이 한층 수월해져서 더욱 신나게 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덕소에서 지내는 동안 계속 눈길이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건설대였습니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신앙촌의 건물을 짓는 그들은 항상 활기차고 힘이 넘쳐 보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박 장로님, 즉 하나님을 은혜를 주시는 영적인 어머니와도 같다는 뜻의 ‘영모님’이라고 부를 때였는데, 영모님께서도 직접 현장에 나와 건설대원들과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들이 더욱 부러웠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제과 공장 공장장님께 건설대로 옮기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처음에는 반대하시던 공장장님께서도 나중에는 제 뜻을 존중해주셔서 마침내 건설대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에 처음 간 날 찬송을 부르던 중 가슴 속까지 와 닿는 시원한 향기가 맡아져
어느 날은 하나님 계신 단상 쪽에 소나기가 떨어져 자세히 살펴보니 단상이 젖거나 물이 고이지 않아 그제야 이슬 같은 은혜임을 깨달아
기장신앙촌 건설대로 일하던 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는데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시니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돼

건설대원이 되어 제가 한 일은 철근 엮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작업 중 하나였는데, 먼저 땅을 파서 단단한 지반이 나오면 자갈을 고르게 펴서 깔았습니다. 그 위에 철근을 엮어 올리고 시멘트를 부어서 건물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2년도에 기장신앙촌 1차 건설대로 선발되어 간 이후에도 철근 엮는 일을 계속 했는데, 1동 건물을 지을 때는 땅이 갯벌과도 같아서 작업이 전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작업 현장에 늘 함께하시며 기운을 북돋아 주시니 저를 포함한 건설대원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의욕적으로 일했습니다.

또 건설대원들은 A, B반으로 나누어 어느 반이 더 빨리, 더 잘하는지 시합을 할 때가 자주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은 마음에 반끼리 똘똘 뭉쳐서 손발을 척척 맞춰가며 일하니 더욱 신나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일에 몰두하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에는 흙탕물이 여기저기 묻어있어서 서로의 모습에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1동 건물 3층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콘크리트를 담아놓았던 제 옆의 리어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제 쪽으로 굴러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잡을 새도 없이 리어카는 빠르게 저를 들이받았고 저는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래는 뾰족한 바위들을 모아놓은 곳이었기에 그대로 떨어지면 저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추락하면서 바위들을 살짝 비켜난 곳으로 떨어졌는데, 그곳은 깊은 물웅덩이가 있는 곳이라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허리에 충격이 가서 움직이지 못하는 저를 곧바로 달려온 건설대 언니들이 의무실로 옮겨주었습니다.

한참 의무실에 누워있었는데 급히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부산에서 바이어를 만나고 돌아오시는 길이었는데 신앙촌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시자마자 경비원에게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으셨다고 합니다. 건설하던 사람이 3층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하나님은 한걸음에 의무실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친 허리를 강하게 축복해주시며 저를 향해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죄짓지 말아야 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참 축복을 받고 나니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움직일 수 있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도 모두 놀라고 신기해했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목숨이니 앞으로는 말씀하신 대로 작은 죄라도 범하는 일 없이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며칠 후 몸이 완전히 회복된 저는 오랜만에 건설대 언니들과 함께 죽성 바닷가에 놀러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던 해녀 한 분이 친근하게 다가와 어디서 오신 분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신앙촌에서 왔다고 하니 해녀 아주머니는 “신앙촌 건물 3층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대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건설 현장에 고용된 외부 목수들이 제가 떨어진 상황을 보고 죽었다고 생각해서 헛소문을 퍼뜨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해녀에게 웃으면서
“거기서 떨어진 사람이 저인데요? 저는 하나님께 축복받고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어디서 잘못된 소문을 들으신 것 같아요.”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해녀 아주머니는 무척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1976년도에 결혼하여 고향인 광주로 돌아온 저는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신앙촌 이불, 메리야스, 간장 등을 판매하며 소비조합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도에 하나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은혜를 직접 체험했던 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셨던 권능이 진짜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무지한 저에게 그토록 귀한 축복을 한없이 베풀어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과 함께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구원을 위해 열어주신 귀한 이 길을 따라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85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사신앙촌, 광주를 거쳐 저와 함께 나주로 이사오신 이후에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오셨기에 나주교회 관장님을 포함해 많은 전도관 식구들이 와주셨습니다. 입관 당시 어머니께 생명물을 수저로 넣어드리면 그대로 잘 넘기셨고, 안색도 환하게 피어나셨습니다. 또한 굳었던 몸이 노긋노긋하게 움직여서 앉혀 놓고 수의를 입혀드릴 수 있었습니다. 환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피어난 어머니를 보니 크신 권능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더욱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언니와 함께 전도관에 첫 발을 내딛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며 하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한 저는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었고, 그 은혜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죄 짓지 말라 하셨던 부드러운 그 음성을 가슴 깊이 새기며 항상 맑고 성결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벌써부터 기쁜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나주 천부교회의 개축공사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나주교회가 아름답고 깨끗하게 완공되면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을 예정입니다. 지금껏 받아오기만 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은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던 그 순간, 전도관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던 그 기쁨의 환희를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전도하는 제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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