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며 끝까지 따라가고 싶습니다”

<신앙체험기 498회 천호교회 홍영자 권사>
발행일 발행호수 2624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498회> 홍영자 권사/천호교회

1940년생으로 인천이 고향인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이런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어디 계신지 잘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 약주 좀 못 잡수시게 해주세요.”

온 가족의 만류에도 건강이 염려될 정도로 술을 드시던 아버지를 멈추게 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때는 진짜 하나님도 모르고, 은혜도, 구원도 모를 때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1956년, 열다섯 살의 가을이었습니다.

하루는 동갑내기인 조카가 같이 전도관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전도관이 뭐 하는 곳인지 물었지만, 조카는 가보면 안다고 길을 재촉했습니다. 조카의 성화에 못 이겨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짠지 공장(단무지 공장)이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지는 중이어서 임시 예배실로 사용하고 있다는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먼저 와서 앉아있었고, 다들 박태선 장로님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조카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굉장히 유명하신 분으로 그분이 인도하시는 예배에서는 기사이적이 일어난다고 하여 그 많은 인파가 몰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박 장로님께서 등단하셨습니다. 장로님이라 하여 연세 지긋하신 분일 거라 짐작했는데, 예상과 달리 훨씬 젊은 분이 단에 오르셔서 의외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장로님은 큰 소리로 예배를 인도하셨으며,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던 중 문득 박 장로님의 목소리가 바닷소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예전에 맛 조개를 잡으러 바닷가에 갔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썰물이 저만치 빠져나갔을 때 뒤에서 들려오던 물이 구르는 듯한 바닷물 소리가 꼭 장로님의 음성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박 장로님은 정말 보통분이 아니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십 년 후 하나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는 성경 구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이심을 발표하셨을 때에도 저는 이분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지어진 후에는 매주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상쾌한 바람과 함께 너무나 좋은 향기가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예배실에 꽃다발을 들고 온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그런 사람은 없었고, 그 향기는 꽃향기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맡아본 일이 없는 귀한 향기였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향취에 관한 말씀을 하실 때 비로소 제가 체험한 것이 향취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매주 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인천 각 지역에서 온 여학생들과 많이 친해졌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일요일마다 이른 시간부터 교회 입구에 줄을 지어 서 있었는데, 차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단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신 하나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저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데, 너무나 진하게 풍겨서 어디까지 이 향기가 퍼져나갈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또 예배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안수를 해주셨는데, 하나님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제 속이 뻥 뚫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몸이 가볍고 시원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귀한 은혜를 체험한 저와 친구들은 전도관 다니는 것이 몹시 즐거워서 예배 시간보다 훨씬 앞서 교회에 도착해 하나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저희끼리 즐거워했습니다.

1957년 4월 25일부터는 서울 용산구 청암동에 위치한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 개관 집회가 열렸습니다. 동시에 제2회 전도관 체육대회도 개최되어 낮에는 서울운동장에서 배구, 농구 등 운동을 하고, 저녁에는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개관집회는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그 중 어느 아침 예배시간이었습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은혜의 창파를 이룬 날로 기억됩니다. 저를 포함해 인천에서 온 친구들은 예배실 2층에 앉았고, 1층에는 인천 소래에서 온 친구 한 명이 따로 앉아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다리가 굽어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제단에 올때도 동생에게 업혀 와야 할 정도로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는 친구였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여기저기서 병이 나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벙어리였는데 말을 하게 되었다 하고, 어떤 사람은 아픈 몸이 나았다고 하는 등 너무나 신기한 장면이어서 유심히 지켜보던 중 1층에 앉아있던 다리 아픈 친구가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2층에 있던 저와 친구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1층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 친구는 아직 다리를 덜덜 떨고는 있었지만 분명히 일어나서 제 발로 서 있었습니다. 친구는 감격한 목소리로 앉은뱅이였던 자신이 이렇게 스스로 일어나게 되었다며 마이크를 통해 큰 소리로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했고, 저희는 그 친구를 에워싸고 발을 동동 구르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소래에서 온 친구는 그 후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걸어 다니며 밝은 얼굴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병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그날, 저는 또 하나 분명히 목격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뽀얗게 내리는 이슬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고 하실 때 예배실 안에 안개가 끼더니 점점 자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실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개는 점점 짙어져서 나중에는 앞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예배실을 가득 메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체험한 그 은혜는 너무나도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앞으로 이분을 따라가야겠구나 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울중앙전도관 개관 집회가 있었던 그해 말에는 소사신앙촌이 건설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앙촌 건설을 위해 많은 교인들이 소사에 와서 일손을 보탰습니다. 저와 친구들도 건설에 도움이 되고자 시간을 내어 소사에 가서 땅 고르는 작업을 도왔습니다. 땅에서 자갈을 캐서 한곳에 모아두면, 어른들이 자갈을 트럭에 실어서 날랐는데, 그 땅에 오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오만제단을 지을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큰 소쿠리에 찐 고구마를 한가득 가지고 오신 하나님 모습이셨습니다. 환하게 웃으시며 고구마를 가져왔으니 많이들 먹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꿀맛 같은 고구마를 먹고 더욱 열심히 일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이어 덕소신앙촌이 완공되면서 저는 1966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해 카스텔라 공장 포장반에서 일했습니다. 당시 신앙촌 카스텔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공장은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혔고, 직원들도 보람과 자부심을 갖고 힘든 줄 모르고 일했습니다.

인천전도관에서 예배드릴 때 상쾌한 바람과 함께 너무나 좋은 향기가 맡아져
이만제단에서는 앉은뱅이였던 친구가 두 발로 일어나고, 뽀얗게 내리는 이슬성신을 눈으로 보게 돼
가슴이 옥죄고 아프던 증상도 축복해 주신 음식을 먹고 완쾌되어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려

이후 저는 덕소신앙촌을 나와서 결혼을 하고 살다가 언제부턴가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화가 잘 안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쌀밥 외에 다른 반찬은 일절 못 먹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옥죄고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만 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찾아가 보았지만 원인은 알 수가 없었고, 세 발짝만 걸어도 쓰러질 지경이어서 교회는커녕 일상생활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1976년의 어느 날, 저를 전도했던 조카가 찾아왔습니다. 조카는 전도관에 가보자고 했지만, 저는 몸이 너무 아파서 못 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조카가 돌아가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은데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 일요일에 큰맘 먹고 집을 나섰는데, 다행히 쓰러질 듯 아프거나 피곤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동생과 함께 무사히 노량진 전도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동생의 부축을 받아 예배실 맨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앉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애타게 부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한참 울고 있는데 예배가 시작되었고, 하나님께서 단에 서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웠던 하나님을 다시 뵈니 너무나 기쁘고 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날 무렵, 하나님께서 다음 주부터는 축복을 해주신다고 하시며 축복받을 물건을 가져오라 하셨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우유와 설탕을 가지고 그다음 주 일요일에 노량진 전도관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축복받을 물건들을 가져왔고, 그 물건들을 한곳에 모아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끝나고 물건들을 모아놓은 곳에 가셔서 쉭쉭 하고 세 번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서 축복받은 우유에 설탕을 타서 한 컵 마셨습니다. 그런데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배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배가 들썩거릴 정도로 덜덜 떨려왔습니다. 밤새도록 끓던 배가 어느새 잠잠해져서 화장실에 갔더니 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한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양이 나와서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배 속이 텅 빈 듯 가볍고 시원했습니다. 그 뒤로 제 병세는 점점 호전되어 예전과 같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렸고, 그 후로 집과 가까운 천호동에 있는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꾸준히 교회에 다니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무척 바빠진 저는 교회에 가지 못하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바쁘게 살며 건강을 챙기지 못했더니 또다시 몸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세가 심각해져서 병원에 가보니 담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운 좋게 바로 수술을 해서 살아날 수 있었지만, 위는 여전히 딱딱하게 뭉쳐서 늘 아팠습니다. 그게 2005년쯤이었습니다. 수술을 집도해 준 의사 선생님은 유산균음료를 많이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마트에서 사다 준 유산균 요구르트는 너무 달아서 위가 더욱 쓰리고 아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달지 않은 유산균음료를 찾던 중 신앙촌에서 요구르트 런이 출시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요구르트 런을 꾸준히 마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누가 꽉 쥐고 있는 것처럼 뭉쳐있던 위가 편안하게 움직이면서 소화가 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요구르트 런을 먹으면서 위가 아파 그동안 먹지 못했던 매운 김치, 쫄깃한 떡도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력을 되찾고 오랜만에 천호 천부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간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머리가 멍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뒤 축복일이 되어 신앙촌에 갔는데 신기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 뒤로도 예배시간마다 머리가 멍하다가, 신앙촌에 가면 머리가 맑아지는 일이 한동안 반복되더니 어느 날은 신앙촌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머리가 번쩍 뜨이면서 정신이 환하게 맑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그동안 들어오지 않던 하나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고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예배시간에 멍해지는 증상은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해 생긴 일인 것 같아 너무나 죄송했고, 다시 맑은 정신을 되찾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앙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신앙촌에서 만들어지는 복된 물건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친한 소비조합 사장님을 따라다니며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물건은 어떻게 구입하는지, 배달은 어떻게 하는지, 홍보는 어떤식으로 하는지 조금씩 배우게 되면서 마침내 2010년 신앙촌상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저는 신앙촌상회를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요구르트 런을 마시고 건강을 회복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신앙촌상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 활기차게 살아가는 지금이 저는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지독히도 몸이 약했던 제가 하나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허락해 주셨던 귀한 은혜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죄송하기만 한 삶이지만, 남은 생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맑고 성결한 삶,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삶, 하루하루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지는 삶을 살며 끝까지 따라가는 제가 되겠습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