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을 따르며 참으로 바쁘고 기쁘게 살아왔구나
김백덕 승사(3) / 기장신앙촌저와 함께 여수제단에 다니셨던 어머니는 70세를 일기로 운명하셨습니다. 20일 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깨끗한 옷을 입혀 다오.”라고 하셔서, 저는 새 한복을 입혀 드리고 교인들과 함께 어머니 곁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주 하나님 날 사랑하셨으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하는 찬송을 부를 때 어머니는 편안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입관예배 때는 관장님과 교인 분들이 생명물로 시신을 깨끗이 씻기셨는데, 다 씻긴 후에 보니 어머니가 살포시 미소를 짓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뽀얗게 피어 발그스름하게 혈색이 도는 얼굴은 돌아가신 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기 있어 보였습니다. 또한 온몸이 너무나 노긋노긋하여 마치 살아 계신 분처럼 앉힌 채로 옷을 입히고 버선을 신겨 드렸습니다. 입관을 마친 후에는 많은 교인들이 저희 집에 찾아와서 아름답게 핀 어머니의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그 고운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보증을 섰다가 경제적으로 곤란해져서 신앙촌 제품을 팔기로 결심해
그동안 장사라고는 해 본 적이 없지만 몇 시간만에 다 팔리자 자신감이 생겨
그 후 제 나이 서른여섯 살 때는 보증을 섰다가 집을 은행에 저당 잡히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부딪혀 보지 않은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난감했습니다. 당시 소사신앙촌이 건설되어 각 공장에서 제품이 생산되고 있었는데, 고민 끝에 ‘신앙촌 제품을 판매해 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장사라고는 해 보지 않았지만 첫날 신앙촌 덧신을 들고 나갔을 때 몇 시간 만에 다 팔리는 것을 보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1960년대 당시는 국산품의 품질이 좋지 않아 ‘미제’라고 하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신앙촌 제품은 미제보다 더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객이 늘어나면서 저는 1965년경 시내 중심가인 중앙동에 ‘시온센타’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하게 생산되는 신앙촌 제품을 여수까지 화물 열차에 싣고 왔으며,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신앙촌 담요는 한 트럭씩 실어와 판매했습니다. 덕소신앙촌 시절에 소비조합에게 피아노를 상으로 주신 때가 있었는데, 저는 아홉 번 상을 받아 피아노를 여수의 각 제단에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몸이 허약하여 조금만 무리를 해도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었던 저는 소비조합을 시작한 뒤로 하루 종일 바쁘게 다녀도 피곤한 줄 모르고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손위 동서는 “자네가 원래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없던 사람인데, 전도관에 다니더니 웃기도 잘하고 말도 잘하네.” 하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또한 딸아이는 “엄마 사는 게 참 보기 좋아요.”라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1960년대 국산품의 품질이 좋지 않아 ‘미제’라면 최고인 줄 알던 시대
신앙촌 제품은 미제보다 더 좋다는 말을 들으면서 ‘시온센타’를 운영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생활도 넉넉해져
그 후 1977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희 가게 단골 중에 50대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남편이 6개월 넘도록 거동을 못해 병석에 누워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병이냐고 물었더니 병원을 다녀 봐도 특별한 병명이 나오지 않고 백약이 무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창 전도를 강조하실 때라 저는 ‘그분을 전도해 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인들 몇 분과 함께 그 댁에 찾아갔더니 남자 분은 자리에 누워서 돌아눕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전도관에서는 은혜를 받아 병이 나은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저희 제단에 한번 나와 보세요.”라고 하자, 그분은 “그동안 별별 약을 다 써도 안 됐는데 교회에 간다고 낫겠습니까? 나는 이제 일어나서 걷는 것은 꿈도 못 꿉니다. 이러다 죽는 거지요.” 하며 기운 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그 댁에 찾아가서 찬송을 부르고 생명물을 조금씩 마시게 했더니, 차츰차츰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얼마 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조금 희망이 생겼는지 “내가 원래 수산물 중개업을 하던 사람인데 내 발로 걸어 다니면서 일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업혀서 매주 여수제단의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제단에 다닌 후 그분은 언제 아팠던가 싶을 정도로 활기차게 걸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병석에 누워서 돌아눕지도 못하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그분은 하나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부인과 같이 열심히 제단에 다녔습니다.
6개월째 거동도 못하고 누워지내는 단골 아주머니의 남편이
병명도 안 나오고 백약이 무효였는데
전도관에 나와 생명물을 마시고 건강을 되찾아
저는 1983년에 교역자로 발령받아 4년 동안 여수제단에서 시무를 했습니다. 그때 박 권사님이라는 분이 노환으로 돌아가셔서 제가 시신을 씻기게 되었는데, 뻣뻣하게 굳은 시신을 생명물로 씻기자 노긋노긋 부드러워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런빛을 띠던 피부가 뽀얗게 피어나고 양 볼에 예쁜 홍조를 띠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시신이 피는 것을 많이 보았으나 제가 직접 시신을 씻겨 보니 뻣뻣하게 굳고 흉하던 시신이 아름답게 피는 것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보다 훨씬 곱고 편안한 고인의 모습을 보고 유족들도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그 후 계속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활동했던 저는 지난 2003년에 기장신앙촌에 입주했습니다. 공기 맑은 이곳에서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귀한 신앙의 터전을 일구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올해 여든넷인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신앙촌의 노인 학교인 ‘은빛교실’에 다니는데, 특히 작년에는 시온실고 1학년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습니다. 거기서 여수 출신의 시온실고 학생들을 만나 얼마나 기쁘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 은혜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마음속으로 기도드립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이 길을 따르면서 참으로 바쁘고 기쁘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던 시절이 일생에 가장 보람 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름다운 천국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삶이 어디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구원의 말씀을 따르면서 맑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