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위기’
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지금 우리사회는 난국에 처해 있다. 그것도 다층적 난국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10년 전의 외환위기 때보다 더 가혹한 고통을 강요하고 있고,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호전성도 어느 때보다 중대한 안보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여기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내외의 엄중한 상황이야말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마음을 합쳐 위기돌파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최근 일부 대학의 교수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냥 시국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사회에 혼란과 분열,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사태는 우려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상대방의 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라 ‘내 탓’과 ‘우리 탓’을 하며 엄중한 자기반성을 통하여 공동체의 미래를 생각할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학교수들이 과거에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비판적 지성의 역할을 해 온 적이 있지만 지금의 시국선언문 발표가 과연 비판적 지성에 합당한 태도인지 의문이 앞선다. 4·19 민주혁명이나 6·10 민주항쟁 때는 명백한 선거부정과 강압적인 통치방식에 대해 항거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공감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물론 정치권이 제 역할을 잘하고 있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여당은 채식공룡처럼 ‘웰빙’생활을 즐기고 있으며, 야당은 기회만 있으면 국회보다 광장으로 달려 나가고 있다. 이 모두 국민들의 여망을 저버리는 실망스러운 처사이나, 특히 정부정책에 비판을 하고자 한다면 정상적인 방식을 통해 따지고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가 발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원리에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시국선언문들에 담겨있는 내용이 한결같이 ‘균형’을 결여하고 있는 정파적 내용이라는 점도 우려의 원천이다. 한국사회 다수의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여와 야 등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시각과 견해가 첨예하게 달라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인데, 이들을 국민적 요구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은 공정하고 정직한 태도가 아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내용도 그렇다. 언론과 방송이 정부·여당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써도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가하면 경찰은 물매를 맞으면서도 폴리스라인을 넘는 일부 과격폭력시위에도 인내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과연 민주주의의 후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자유는 방종과는 다른 것이다. 자율과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쇠파이프와 화염병까지 등장하는 불법·폭력을 동반하는 집회·시위마저 허용하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소금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바이블에서 말하고 있는데, 지성도 마찬가지다. 자신들만이 공감하는 정파적 내용을 시국선언이라는 형식을 빌어 발표하는 것은 공정한 방식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통합과 안정이 필요한 시기다. 우리 모두 ‘남 탓’을 하기보다 스스로의 잘못은 없었는지 성찰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함께 힘을 모을 때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