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를 모르는 종교
“나는 (빌렘 신부가 독립 운동가를 밀고한 역사의 기록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우리의 가장 위대했던 독립운동 단체가 천주교의 밀고로 박살난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테라우치 총독에게 잘 보이려는 천주교 주교의 추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비열한 행동이다. 밀정이 따로 없다. 그러니까 안명근(안중근의 사촌 동생)은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고 빌렘 신부는 고해성사 내용을 일본군 사령관에게 밀고하여 결국 신민회는 전원 검거되고 만 것이다. 당시 천주교는, 신민회를 밀고하는 대가로, 명동성당 앞길을 넓히는 허가를 받아냈다고 한다. 지금 명동성당 앞의 널찍한 길은 105명의 피와 맞바꾼 치욕의 더러운 길이란 의미다. 나는 명동성당 앞을 지나가면 항상 침을 뱉곤 한다.”
이것은 신부의 밀고로 105명의 애국지사가 일망타진됐다는 소위 ‘신민회 105인 사건’의 기록을 보고 어떤 블로거가 올린 글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천주교의 반민족적 행태는 상식을 초월한 바 있었다. 이에 앞서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천주교는 의사의 의거를 ‘살인’으로 단죄하고 배척했다. 당시의 천주교 주교는 사형 집행 직전 “고해성사를 받고 싶다”고 한 안 의사의 간곡한 요청도 “암살자가 가톨릭 신자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안 의사는 사건직후 자신의 행위는 신앙인의 양심과 배치되지 않고, 대한제국 의병장 신분으로 일제의 수괴를 사살한 것이므로 정당방위였다고 당당히 진술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지만, 유독 조선 천주교 측에서는 이를 ‘살인’으로 단죄하고 최후의 길을 가는 안중근을 괴롭혔다.
조선 천주교 지도자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적대시 했으며 3.1운동도 부정했다. 그들은 3.1운동에 가톨릭이 참여하지 않은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운 것이라 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통치가 가톨릭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떠들고 다녔다.
조선 천주교회는 1925년 신사참배가 이단이라고 금지해 놓고 1936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린다. 교황청은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신사에 참배하도록 권장했고 노기남 등은 솔선하여 신사참배에 앞장섰다. 노기남은 오까모도 데쓰지라고 창씨개명까지 한 후 황군(皇軍)의 무운장구를 위해 기도했고, 총체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선 조선 천주교회는 순교정신으로 일제에 협력하라고까지 한다.
해방 후 노기남 등 천주교 지도층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회개 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반성과 회개는 없었다. 천주교는 발 빠르게 해방 후 주둔군으로 진주한 미군을 위한 미사를 열어서, 얼마 전까지 일제가 미군을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던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종교의 역사는 종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온갖 박해와 핍박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것으로 점철돼 왔다. 만일 어떤 종교가 그 조직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교리까지 내던지며 권력에 굴복하고 아부한다면 그 종교는 이미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미혹(迷惑)하는 암적 존재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천주교에서는 ‘민주화 운동’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이 ‘살인자’로 매도했던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슬그머니 들고 나타나는가 하면, 최근에는 (안중근 의사의) ‘살인’을 용서했다며 추모 미사까지 연다고 이중적 태도를 보여 식자들을 씁쓸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