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을 받으면 뉘 죄든지 사할 수 있다는 성경구절을 모르시나요?

함복득(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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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그 후 저는 보광동으로 이사하여 집과 가까운 보광동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당시 보광동제단에는 폐병으로 고생하는 여자 교인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운명하시기 얼마 전부터 교인들이 자주 그 집에 가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리에 몸져누워 있던 그분은 뼈와 가죽만 남았다고 할 정도로 바싹 말랐으며 얼굴빛도 무척 검었습니다. 그런데 숨을 거둔 후 입관예배를 드리며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나자 해골같이 말랐던 얼굴에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부가 아기 피부처럼 뽀얗게 피어나고 양 볼에는 발그스름한 혈색이 감돌았으며 이슬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보기에 안쓰러웠던 생전의 모습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고 ‘어쩌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하고 감탄하며 고인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시신이 피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폐병으로 고생하던 여자교인의 장례
해골같이 말랐던 얼굴엔 살이 오르고
뽀얗게 피어 발그스름한 혈색이 돌아
시신 피는 모습에 하나님의 권능 깨달아

1958년 12월에는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특정 종교계와 일부 정치인들이 결탁하여 구속과 투옥으로 하나님을 옭아매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공판이 열릴 때마다 법정에 찾아가서 여러 번 공판에 참석했는데 어느 날인가 유호준 목사가 증인으로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 박사라고 불리던 유 목사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박태선 장로는 사람인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하니 이단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성경에 ‘성신을 받으라, 성신을 받으면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지고 정하면 정하여지리라.’ 한 구절이 있지요?” 하고 말씀하시자 유 목사는 몹시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출입문 쪽을 계속 쳐다보던 유 목사는 결국 도망치듯 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판이 계속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내가 예배를 인도하면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립니다.” 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뻣뻣하게 굳은 시신에 생수를 바르면 노긋노긋 부드러워지며 입술에 빨갛게 핏기가 돈다고 하시면서 ‘생수와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한번 보여 주고 싶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판 중에 변호사는 변론을 할 때 신앙촌에 대해 설명하면서, 소사신앙촌에는 학교를 세워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신앙촌 주민들을 위해 주택과 수도, 전기 등 필요한 시설을 완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원만하고 행복하게 생활하며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도 귀감이 되는 일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과연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판에 나온 유호준 목사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니 이단이다” 라고
하나님의 한 말씀 반박에
홍당무가 되어 꽁무니 빼고 도망쳐

아무런 죄도 없이 모진 옥고를 치르신 하나님께서는 1960년 3월 26일에 출감하셨습니다. 그날 전국에서 교인들이 하나님을 뵙고자 소사신앙촌에 모여들었으며 저도 소사신앙촌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착하시자마자 힘찬 걸음으로 노구산의 오만제단으로 향하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단상에 서서 처음으로 하셨던 말씀, 여러분들의 죄를 씻어 주겠다고 하셨던 그 부드러우신 음성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 제 친구의 백일 된 딸이 경기(驚氣)를 하다가 갑자기 숨을 거두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저는 그 친구에게 ‘전도관에서는 시신이 핀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아이가 숨을 거둔 후 친구가 전도관식으로 입관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제가 시신을 씻기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경기를 하다 죽어서인지 손에 무엇을 쥔 것처럼 손가락을 딱 오그린 채로 굳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명물로 닦고 나자 오그라졌던 손가락이 스르르 펴졌을 뿐 아니라 뽀얗게 핀 얼굴에 발그스름한 핏기가 감돌며 방그레 미소를 짓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딸아이를 잃고 눈물을 흘리던 친구는 아이의 모습을 보더니 “우리 애가 웃어.” 하면서 어느새 눈물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저는 1962년 5월에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제과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몇 달 후 덕소신앙촌으로 제과 공장이 옮겨 가면서 덕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허약한 체질인 저는 어려서부터 자주 앓아누웠으며 간단한 집안일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기운이 너무 없어서 집 안에만 지냈는데 신앙촌에 들어온 후로는 차츰차츰 건강해져서 남들 못지않게 일하며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동료들과 같이 찬송을 부르면서 즐겁게 일하다 보면 어느새 근무 시간이 훌쩍 지나곤 했습니다. 또한 어릴 때부터 골치가 자주 아파서 어머니가 “네 머릿속에 무엇이 있는지 봤으면 좋겠다.”라고 하셨는데, 신앙촌에 입주한 뒤로는 그 고질적인 두통이 깨끗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덕소신앙촌 제과공장에 근무하던 1965년에 견학온 안익태 선생을 보고
그 후 신앙신보에 실린 그분의 신앙촌 방문 소감을 관심있게 읽었는데
‘절망뿐인 한국인데 신앙촌에 가서 소망을 발견했다’고 한 것이 인상적

당시 덕소신앙촌에는 매일같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힘차게 가동되는 공장 시설을 견학하고 한강 변에 들어선 세련된 주택 단지를 둘러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1965년 5월 중년의 신사 한 분이 안내를 받아 제과 공장을 견학하셨는데 그분은 바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었습니다. 저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안익태 선생이 생산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는 모습을 보면서 ‘유명하신 분을 직접 뵙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안익태 선생의 신앙촌 방문 소감이 신앙신보에 실려서 관심을 갖고 읽어 보았습니다. 안익태 선생이 ‘내가 만나 본 한국 사람들은 백이면 백 전부가 절망뿐인데 신앙촌에 가서 소망을 발견했다. 이렇게 하면 산다는 소망을 주었다.’라고 했던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는 공장 지대에 마련된 운동장에서 자주 농구와 배구 경기를 벌였습니다. 각 공장에서 선발된 선수들은 바쁘게 일하는 한편으로 열심히 연습하여 기량을 닦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신나게 함성을 울리며 응원하곤 했습니다. 또한 신앙촌 사람들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여 달리기를 할 때면 하나님께서 상품을 푸짐하게 주시며 꼴등을 하더라도 절대 중간에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제가 달리기에서 5등을 했을 때 축복 캐러멜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장신앙촌에 온 뒤에도 운동을 강조하시며 새벽예배를 마친 후 친히 체조를 가르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상하게 이끌어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약 체질로 어려선 자주 앓아눕고
간단한 집안일에 엄두도 못냈는데
신앙촌에 들어온 후 차츰 건강해지고
고질적인 두통도 깨끗이 사라져

1987년 기장신앙촌에 시온 입사생이 들어올 때부터 저는 입사생들과 함께 근무를 했습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던 아이들이 학업을 마친 후 신앙촌 곳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볼 때면 대견스럽기도 하고 새삼스레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됩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때 하나님 은혜 안에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귀한 은혜 속에서 이 길을 따라올 수 있었는데, 감사의 기도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이는 일흔이 훌쩍 넘었어도 젊은이처럼 밝은 마음으로 생활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고 싶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면서 죄와는 상관없이 맑고 성결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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