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종교, 행함의 종교
천부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다른 종교는 모두 믿음의 종교인데 반해 천부교는 행함의 종교라는데 있습니다. 믿음의 종교라는 것은 믿음만으로 벌써 종교를 믿는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예로 들면 예배당에 나와 예수를 믿으면 벌써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식인데 구원의 전제 조건을 죄의 해결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죄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행함의 종교란 죄는 믿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 지난(至難)한 노력 끝에 쟁취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쉽게 비유하면,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고 할 때 믿음의 종교란 서울에서 부산을 간다고 믿기만 하면 저절로 가게 된다는 종교이고, 행함의 종교란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면 기차나 버스나 비행기 표를 사서 기차나 버스나 비행기를 실제로 승차하는 행함이 있어야 비로소 갈수 있다는 종교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면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지 않고 때가 씻어질 줄 믿는다고만 하면 저절로 때가 씻어 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에 들어가 비누를 묻히고 수건으로 문지르는 행함이 있어야 씻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있어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종교의 영역에서는 믿기만 하면 행함이 없어도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황당한 교리를 가지고 사람을 속이는 일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고, 사람들은 수 천 년 동안이나 그런 종교에 속아서 구원의 길을 잃고 미로를 헤매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으나 기독교의 이론을 정립한 바울이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바울의 주장이 아니라도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로 그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진 종교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예배당 문안에만 들어오면 성신을 받은 것이요, 내 이름만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절대예정설로 이어져 구원을 받고 지옥을 갈자는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전연 없는 것이라는 괴이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잘못된 교리는 구원을 얻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함의 노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하게 하여 필연적으로 개인의 파멸과 종교의 끝없는 부패를 가져 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벌써 구원을 얻었다고 믿은 결과로 종교는 썩는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부패하여 사회와 국가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불신자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인간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았던 믿음의 종교는 폐기되고, 행함의 종교가 인류를 이끌어 구원해야 할 새 시대가 왔습니다. 교묘한 위장술로 인류를 기만해 온 믿음의 종교의 시대는 가고, 행함의 종교가 행함의 빛을 발하여 캄캄한 세상에 구원의 등대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