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물로 핀 시신을 보고 ‘네가 왜 전도관에 다니는지 알겠다’
백경숙 권사(2) / 성동교회당시 원효로 구제단에서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 청암동 산언덕에 웅장한 전도관(이만제단)을 신축하게 되었습니다. 일요일이면 한창 건축 중인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예배 시간마다 죄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세요. 더럽고 누추하던 마음이 성신으로 씻음을 받아 눈보다 더 희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천국을 이루고 하늘나라에 갈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눈길로도 마음으로도 죄를 짓지 말라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죄를 멀리하며 성결하게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 후 제가 사는 염리동에 아담한 전도관이 마련되어서 제단 근처의 교인들은 거기서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염리동제단에 다니는 집사님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단에 다니지 않으셨던 고인은 따님 댁에 다니러 왔다가 숨을 거두셨는데, 입관예배를 드리기 전에 보니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고 난 후에는 얼굴에 가득하던 주름살이 다 펴지고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는 것이었습니다. 맑고 뽀얀 피부가 소녀처럼 고와 보였으며 뻣뻣하던 온몸이 어느새 노긋노긋해져서 팔다리가 자유자재로 움직여졌습니다. 그때 시신이 피는 것을 처음 보았던 저는 ‘돌아가신 분이 어쩌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하며 너무도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전도관 교인들은 “어머니가 잘 피셔서 따님보다 더 고와 보이네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밤새도록 그 집에서 일을 돕고 찬송을 부르면서 장례 절차를 마칠 때까지 함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창 무더운 여름이었던 그때 시신을 모신 방 안에 들어가 보면 관 주위에 계속해서 시원한 바람이 감도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바람과 같이 임하시는 성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던 저는 ‘아! 성신으로 지켜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큰아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자주 열이 오르며 경기를 하더니 초등학교에 들어간 뒤로는 간질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는 운동을 좋아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인데 자꾸만 정신을 잃고 발작 증세를 보이니 이만저만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집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지더니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을 하얗게 뒤집은 채로 고통스럽게 사지를 뒤트는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끌어안고 ‘얘야, 평생 이 병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겠니. 내 죄가 많아서 네가 이렇구나.’ 하며 눈물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 이 아이를 어떻게 합니까. 제발 낫게 해 주세요.’ 하고 애타게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나는데, 얼마 후 큰아들이 원효로 구제단에서 하나님께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찰을 받은 후부터는 간질 증세가 거짓말처럼 깨끗이 사라지더니 아들 나이가 환갑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재발된 적이 없습니다. 그 은혜에 한없이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도 부족할 뿐입니다.
그 후 1960년 3월 26일, 이날은 하나님께서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르시고 소사신앙촌으로 돌아오시던 날이었습니다. 초창기부터 온갖 비방과 중상모략을 가하여도 전도관의 교세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위정자들과 종교 세력이 결탁하여 옥고를 치르시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는 날 저는 삼 남매 아이들과 함께 소사신앙촌으로 향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교인들과 신앙촌 사람들이 하나님을 뵙고자 정문에서부터 도열해 있었는데, 코트 차림의 하나님께서는 힘찬 걸음으로 오만제단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그날부터 바로 예배가 시작되어 저는 아이들과 함께 며칠 동안 소사신앙촌에 머무르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제단에 다니지 않던 저희 남편은 저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소사신앙촌에 찾아왔는데, 신앙촌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에 크게 느낀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끼리 놀다 보면 다투기도 할 텐데 “싸우면 죄야.” “죄지으면 안 돼.” 하며 싸우지 않는 것을 보면서 ‘신앙촌이 다르긴 다르구나. 애들을 키우려면 여기서 키워야 되겠다.’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평소에 제가 간절히 원했던 대로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자고 하여 저희 식구 모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번은 제가 안찰을 받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죄짓지 말라 하시며 50명 이상 전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저는 ‘어디서 그 많은 수를 전도하나?’ 하며 막연하고 어려운 생각도 들었지만, 우선 용기를 내어 심방위원들과 함께 주변 동네를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집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주 예배를 드렸는데 어른들이 힘차게 찬송하며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고는 어린이들도 같이 모이게 되어 숫자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매일 매일 심방을 다니고 예배를 드리면서 어느새 50명이 넘게 전도되었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부지런히 심방을 다니는 동안 참으로 기쁘고 즐거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저는 소사신앙촌의 주민 업무를 맡아 보는 백부 사무실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1977년 서울 종암동으로 이사해 종암동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81년 남편이 직장암을 앓다가 쉰여덟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는데, 시신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어서 옷을 가위로 잘라 벗긴 후 생명물로 깨끗이 씻었습니다. 푸릇푸릇한 빛을 띠던 피부색은 생명물로 씻은 후 뽀얗고 맑게 피어났으며, 뻣뻣하던 몸이 어느새 부드럽고 노긋노긋해져서 팔다리를 움직여 수의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편안하게 잠든 것 같은 그 모습에 시댁과 친정 식구들 모두 놀라워했고, 남편의 누님은 저를 보며 “네가 왜 전도관에 다니는지 이제 알겠구나.”라고 했습니다.
올해 여든하나인 저는 건강하게 생활하면서 제단에서 하는 활동이라면 무엇이든 빠지지 않고 참여하려 합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젊은이들이 “가볍게 걸으시는 게 할머니 같지 않아요.” 하는 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고생하던 때를 떠올리면서 건강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그 귀한 은혜를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는 날까지 힘차게 구원의 길을 가고 싶은 소망뿐입니다. 그리운 하나님 그날에 꼭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