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 어떤 죄를 지었든 예배당에만 나오면 천국 간다고?

<364회>백경숙 권사(1) / 성동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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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28년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난 저는 다섯 살 때 서울로 이사 와 살게 되었습니다. 외조부모님은 감리교회의 장로와 권사로 재직하셨으며, 주일학교 시절 저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다니면서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아이였습니다. 제 나이 열아홉 살에 종교를 믿지 않는 가정으로 시집을 가면서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는데, 몇 년이 지난 후 서울 공덕동에 살면서부터 감리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공덕동 감리교회에 다니게 된 저는 ‘어떻게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학교에서 교과목을 배우는 것처럼 ‘천국이 어떤 곳이며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 싶어서 목사의 설교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천국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고 막연할 뿐이어서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 목사에게 “목사님, 어떻게 믿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백 집사님처럼만 믿으면 다 천당 갑니다. 예배당에 들어온 사람은 이미 천당에 가기로 예정된 것입니다.”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을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어떤 죄를 지었든지 간에 예배당에만 들어오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 의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제 마음속에 무겁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후 1950년 육이오전쟁이 일어나 저희 가족들은 마산으로 피난을 내려갔습니다. 그 당시 셋째아이를 임신 중이었던 저는 엄동설한에 판잣집의 차디찬 방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저는 살집이 있는 건강한 체격이라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첫째 아이를 낳은 후부터는 점점 몸이 마르며 쇠약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전쟁 통에 힘들게 셋째 아이를 낳은 뒤로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배 속에 단단한 덩어리가 만져지는데 그것이 때때로 가슴까지 치고 올라오면 숨이 막힐 듯하며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쟁이 끝나 서울로 돌아온 후에 저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약방을 비롯해 여러 곳을 다니며 진찰을 받아 보았습니다. 진찰 결과 위장과 신장, 자궁이 몹시 안 좋은 상태이며, 배 속에 단단한 것은 ‘적(積)’이라고 하는데 나쁜 덩어리가 뭉쳐 있어서 절구에 빻아도 빻아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여 여간해서는 낫기 힘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20대였던 제가 육십 먹은 노인네 기력보다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운 형편에도 병을 낫게 하려고 한약을 지어 먹었는데, 허약한 몸이 약 기운을 견디지 못해서인지 자꾸 쓰러져서 지은 약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자식들과 동생들을 돌보면서 힘겹게 집안일을 해 나갔습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마음까지 점점 지치게 되었고, 조용하고 말이 없었던 저의 성격은 어느새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변하여 작은 일에도 곧잘 화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6년경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의 부흥집회에 다녀오셨는데, 그때부터 다니던 공덕동 감리교회에 가지 않으시고 박 장로님이 세우신 ‘전도관’으로 다니셨습니다. 전도관이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던 저는 ‘왜 하필이면 전도관으로 가실까?’ 하며 못마땅했지만, 어머니는 틈만 나면 박 장로님의 설교 말씀을 저에게 들려주시며 함께 전도관에 가자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은혜를 받아 병이 나은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다고 하시면서 저도 전도관에 다니면 병이 나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전도관 교인이신 아주머니 한 분을 집에 데려오셨는데, 그분은 자신의 폐병이 은혜를 받고 깨끗이 나았다면서 “애기 엄마, 젊은 사람이 건강해야지요. 전도관에 나와 봐요.” 하며 몇 시간 동안 설득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차츰 마음이 움직인 저는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고, 그다음 일요일에 어머니와 그분과 함께 원효로 구제단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보니 기다랗게 생긴 예배실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들어차서 앞자리에 앉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저희 일행은 간신히 예배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는데, 곧이어 등단하신 박태선 장로님은 큰 키에 단정하고 세련된 양복 차림이 돋보이는 신사 분이셨습니다. 강대상 앞에 우뚝 서 계신 위엄 서린 모습은 왠지 똑바로 바라보기가 두려웠으며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친 후 박 장로님께서 안찰을 해 주신다고 하여 저도 수많은 사람들 틈에 줄을 서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박 장로님께서 배에 살짝 손을 대시는 순간 얼마나 아픈지 그 고통을 형언하기가 어려웠으며, 저도 모르게 팔다리를 버둥거려서 주위에 계신 분들이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이 혈기가 빠져야 됩니다. 죄를 씻어야 천국에 가지요.” 하고 말씀하시는데 그 음성이 마치 우레와 같이 커다랗게 들려 왔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은 후 집에 돌아오고 보니 배가 몹시 고파서 곧바로 부엌에 들어가 밥 한 공기를 금세 비웠습니다. 그때까지 밥 한 숟가락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속이 너무나 편안해진 것이었습니다. 피골이 상접했던 제가 밥을 잘 먹게 된 것을 보고 식구들뿐 아니라 시댁의 어른들까지 무척 놀라워하면서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일요일마다 전도관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전도관에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하나님께서 꿈에 오셔서 안찰을 해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생시와 똑같이 안찰을 받은 후 꿈에서 깨고 보니 안찰받은 자리가 너무나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고 제단에 다니면서 배 속에 뭉쳐 있던 덩어리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차츰 기운을 차리며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혈기가 빠져야 된다.’ 하시던 음성이 귓가에 계속 울려서, 이전 같으면 크게 화를 냈을 만한 일이 생겨도 저 스스로 자중하고 절제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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