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은혜 속에 살아가고 싶어

박만조 집사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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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3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삼대가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서 어릴 적부터 집과 교회밖에 모르고 자랐습니다. 스무 살에 미신을 섬기는 집으로 시집가서는 교회에 못 나갔는데, 집 근처 새로 생긴 교회에 동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 같았고 예배 시간이면 “감람나무 이겼네~” 하는 찬송이 들려왔습니다. 처음 듣는 찬송이라 궁금해서 가고 싶었지만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엄두를 못 냈습니다.

그 후 1960년 즈음으로 기억됩니다. 남편 직장을 따라 경기도 김포로 분가했을 때였습니다. 세 살 난 둘째 아들이 아침마다 눈이 아프다며 보채는 것이었습니다. 해가 지면 잠잠해졌다가 날이 밝으면 아프다며 울고불고 야단이었고,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우는 아이를 달래는데 앞집 사는 이영숙 씨가 그 모습을 보고는 부흥집회에 가면 병자들이 많이 낫더라며 아이를 데려가 보자 했습니다. 저는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듯 뭐라도 해 보고 싶어서 그 주 일요일 아이를 데리고 이영숙 씨를 따라나섰습니다.

소사역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산으로 올라가니 정상에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영숙 씨가 쪽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뒤따라가니 바로 단상이 나왔는데 예배실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예배실이 얼마나 넓은지 끝이 안 보일 정도였고 사람들이 머리만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단상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키가 훤칠하신 신사 분이 나오셨습니다. 이 교회를 세우신 박태선 장로님이라 했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교인들이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르는데 그 소리와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전도관에서 예배드릴 때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서 자꾸만 가고 싶어
단상 앞으로 뽀얀 것이 내려 물어보니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는 거라고 해

예배 마친 후에는 박 장로님께서 아이에게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안찰이 뭔지 잘 모르면서도 박 장로님께 안찰 받고 병이 나은 사람이 많다고 하기에 아픈 사정을 말씀드려서 안찰을 받게 됐습니다. 아이를 눕혀 놓고 배에 손을 대시자마자 아이가 도르르 몸을 말면서 아프다고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인자하신 음성으로“낫게 해 줄 테니 편안히 다리를 뻗으라.” 하며 손을 가만히 대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차츰차츰 몸을 펴더니 다리를 뻗었습니다. 눈을 안찰하실 때도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중에는 편안한 얼굴이었습니다. 안찰을 받고 예배실 밖으로 나와“엄마!” 하고 저를 올려다보는데 눈동자가 샛별같이 반짝거렸습니다. 햇살만 비치면 눈살을 찡그리며 울던 아이가 활짝 웃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산길을 깡충깡충 뛰며 내려갔습니다.

산 아래 동네로 내려와 보니 멋진 주택과 공장, 학교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소사신앙촌이라는 곳으로 박 장로님께서 세우셨으며 전도관 교인들이 모여 산다고 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 세우신 ‘전도관’이 전국에 있다는 것과 예전에 들었던 ‘감람나무’ 찬송이 전도관에서 부르는 찬송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습니다.

박 장로님께 안찰 받은 후로 둘째는 깨끗이 나았고, 병원에서 못 고치던 병이 안찰 한 번에 낫게 되니 참 신기하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집과 가까운 김포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일예배만 드리다가 매일 새벽예배까지 드리게 됐습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서 자꾸만 가고 싶었습니다. 또 소사신앙촌에도 자주 가서 예배드렸는데 단상 앞으로 뽀얀 것이 내려 박 장로님 모습이 잘 안 보이는 때가 많았습니다. 교인들한테 물어봤더니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호세아서에 보면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자가 감람나무와 같다고 돼 있는데, 박태선 장로님께서 바로 그 은혜를 내리신다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봤어도 감람나무나 이슬 은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금방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서 전도관은 감람나무 찬송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이 물통을 놓아두면 하나님께서 “쉭! 쉭!”하시며 축복해 주셔
생명물을 받아와서 옷장에 넣어 두고 잊어버려 8년이 지난 후 열었는데
처음 받아 왔을 때와 똑같이 맑고 깨끗해서 참 놀랍고 신기해

원래 남편은 종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남편이 전도관에 나오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사이에 돌 지난 셋째가 기어오다 국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라 아이를 꺼내 보니 온몸에 화상을 입어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저녁이라 문이 닫혀 있어서 다시 전도관으로 내달렸습니다. 둘째가 안찰 받고 눈이 나았을 뿐 아니라 전도관에서 생명물을 마시고 병이 나은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에 다급한 마음에 생명물을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저녁예배를 드리던 전도사님과 교인들은 아이를 보고 얼른 생명물을 가져와 온몸에 발라 줬습니다. 아이는 보채지도 않고 가만있더니 스르르 잠들었는데, 그때 남편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예배실에 들어섰습니다. 퇴근해서 아이가 데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워 있던 아이가 말소리를 듣고는“아빠!” 하며 일어나 보르르 기어서 남편 무릎에 앉았습니다. 그제야 남편은 안심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어려서 사촌동생이 데었을 때 말도 못하게 보채고 울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이의 온몸에 축복솜을 붙여 주고 솜이 마르지 않도록 생명물을 계속 적셔 주었습니다. 밤낮으로 생명물을 적셔 주며 일주일이 지났을 때 시어머니가 좋은 약을 구해 왔다며 솜을 떼고 약을 발라 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얼굴에 붙인 솜을 떼고 보니 뽀얀 피부에 발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것이었습니다. 보드라운 연분홍 꽃잎처럼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습니다. 솜을 다 떼보니 온몸에 새살이 돋아나 흉터 자국조차 없었습니다. 시어머니도 아이를 보고 어떻게 국솥에 빠졌는데 흉터 하나 없느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보들보들한 아이 얼굴에 제 볼을 대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주 일요일에 남편은 감사헌금이라 쓴 봉투를 들고 저보다 먼저 예배에 가더니 김포전도관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아이들이 다치거나 아플 때 생명물로 나은 일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평택에 사는 시누이가 한 번씩 집에 와서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하다고 하기에 생명물에는 하나님 은혜가 담겨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시누이는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평택전도관에 스스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생명물로 고인을 깨끗이 씻기고 나니
얼굴이 맑고 뽀얗게 핀 데다 입술이
루주를 바른 것처럼 발그스름해서
사람들이 화장한 것 아니냐며 만져봐

이듬해 저희 가족은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고 1962년 덕소신앙촌이 건설된 후에는 덕소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신앙촌에 있는 공장에서 갖가지 제품이 생산됐는데 신앙촌 물건은 품질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소비조합원들이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며 부지런히 사는 것이 좋아 보여서 저도 서른세 살 때부터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시골에서만 살아 지리를 모르고 말주변도 없었는데 신앙촌 이불을 가져가면 사람들이 반색하며 모여 들었습니다. 그때는 집에 신앙촌 이불을 장만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 가도 사람들이 서로 이불을 갖다 달라 하니 주문대로 가져다주기도 바빴습니다. 고객들을 만나며 바쁘게 다니는 것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는 생명물 축복하시는 모습을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제단 앞 광장에 물통을 놓아두면 하나님께서 “쉭! 쉭!” 하시며 물통을 향해 축복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생명물을 받아와서 옷장에 넣어 뒀다가 그 옷장을 사용하지 않게 되어 잊어버리고 지냈습니다. 한참 후 옷장을 열었는데 생명물이 처음 받아 왔을 때와 똑같이 맑고 깨끗한 것이었습니다. 햇수를 세어 보니 8년이나 지난 때였습니다. 생명물이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직접 보게 되니 참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생활하며 입관예배를 드릴 때마다 시신이 아름답게 피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보다 더 곱고 환하게 피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입관예배가 있다 하면 빠짐없이 다녔습니다. 이웃에 사시던 권사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생명물로 씻겨 드리고 나자 얼굴이 맑고 뽀얗게 핀 데다 입술이 루주를 바른 것처럼 발그스름해서 사람들이 화장한 것 아니냐며 만져 보기도 했습니다. 당뇨병을 앓던 남편이 1983년 숨을 거뒀을 때는 입관예배를 드린 후에 좋은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제단에서 예배 시간에 향취를 맡고 그것이 하나님 은혜라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입관예배를 드릴 때도 향취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아들이 “아빠 계신 방에 향수 뿌렸어요? 자꾸 향기가 나요.” 하기에 은혜를 주신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생명물로 깨끗이 씻긴 후 남편은 생시의 병색이 사라지고 환하게 핀 모습이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마다 놀라워했습니다.

그 후 저는 1990년 기장신앙촌에 입주해 소비조합을 계속했습니다. 젊은이도 못 따라올 정도로 활기차게 다니며 나이를 잊고 지냈는데 어느새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기쁘고 즐거웠던 일이 많이 떠오릅니다. 예배 시간이면 기쁨이 넘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찬송을 불렀고, 좋은 향취가 진동할 때면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상 어디에서 그런 기쁨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행하고 은혜 속에 살 수 있다면 그 마음이 바로 천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하루 마음의 천국을 이루며 아름답게 살아서 그날에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박만조 집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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