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교인에게 감람나무를 질문하니 횡설수설하며 답변 못해

김엄정 승사(3) / 영덕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317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제가 어머니와 함께 영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감쪽같이 나은 눈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정말 수술하지 않고 전도관에 가서 눈이 나았느냐면서 신기해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전도관에 다녀온 후로 저희 어머니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심한 가슴앓이가 있어서 속에서 뭉친 것이 치받고 올라오면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했으며 증상이 심할 때는 아편을 조금씩 먹어야만 그나마 가라앉을 정도였습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가슴앓이를 하셨는데 부산전도관에 다녀온 후로 그 증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박 장로님께서 안수해 주실 때 가슴 속에 불덩이가 들어온 것처럼 뜨겁더니 그때 내 병을 고쳐 주셨나 보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는 86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가슴앓이를 하지 않으시고 건강하게 지내셨습니다.

저는 부산전도관에 다녀온 후부터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고 가지 않았습니다. “기성교회에 구원이 없다.”라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기성교회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매일매일 나가던 곳에 가지 않으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허전함이 커지면서 ‘영해에는 전도관도 없는데 왜 꼭 전도관에만 가야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것이었습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져서 저는 매일 무릎을 꿇고 ‘저에게 바른 길을 알려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던 어느 날, 예전에 전도관에서 맡았던 향취가 온몸을 감싸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것은 향취다! 감람나무가 주시는 은혜다!’ 하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 장로교회에 다닐 때는 이런 은혜를 몰랐지. 예배당에만 나오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도관에서 받았던 은혜를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서 ‘구원을 얻으려면 은혜를 받아서 죄를 씻어야 한다. 내가 진실로 구원을 원한다면 은혜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구나!’ 하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꼭 전도관에 나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바른 길을 인도해 주소서`기도 중
예전에 전도관에서 맡았던 향취 진동
`아! 이건 감람나무 은혜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몰라

제가 울진군 후포면에 시집간 후로 영해전도관이 세워지면서 저는 영해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영해제단까지는 50리의 먼 길이었기 때문에 일요일 새벽에 집을 나서야 겨우 낮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예배에 가지 못하는 것이 항상 안타까웠던 저는 아들딸을 데리고 방에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희 시댁은 인근에서 유명한 감리교 집안으로, 교회의 원로이자 기둥 장로인 시아버지와 신학대학에 다니는 시동생, 목사로 시무하는 시외삼촌 등 친척들 대부분이 독실한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그런 집에 시집간 제가 감리교회에 나가지 않고 전도관에 다녔더니 “결혼을 했으면 시집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이야기하는 동네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 또한 며느리로서 시부모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도리로 알고 살았지만 신앙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확실한 은혜를 받았고 깨달은 것이 있었기에 누가 뭐라 해도 전도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부모님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으나 제가 눈이 아팠을 때 전도관에 가서 나은 일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심하게 반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시댁이 인근에 이름난 감리교 집안
시부모님 따르는 것도 도리이지만
전도관에 와서 받은 은혜 분명하니
신앙만큼은 양보할 수 없어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시아버님께 감람나무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버님, 성경상의 감람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라고 여쭈었더니 아버님은 감람나무가 모세다, 엘리야다 하고 말씀하시다가 분명한 대답을 들려주지 못하셨습니다. 온화한 성품의 아버님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시며 “네가 얼마나 안다고 질문을 하느냐?” 하고 화를 내셨습니다. 그래도 저는 정중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 저도 처음에는 목사의 말만 듣고 전도관이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도관에 가서 감람나무가 내리시는 은혜를 직접 받아 보고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이다를 먹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아는 것처럼 은혜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은혜를 알 수 있겠습니까? 무조건 이단이라고 하지 마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체험했던 은혜를 자세하게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호세아서에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자’가 감람나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분이 바로 박태선 장로님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님은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못 하셨습니다.

1967년 제 나이 서른세 살 되던 해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하혈이 계속되어 포항에 있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자궁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수술을 받고 치료하면 된다고 했지만 수술비와 입원비, 치료비까지 큰돈이 들 것을 생각하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시부모님은 집을 팔아서라도 사람을 살려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일단 수술을 하기 전에 다른 곳에서 검사를 받아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친정어머니가 계시는 소사신앙촌에 올라가 부천의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결과는 마찬가지로 자궁암이라면서 당장 수술하자고 하여 그다음 주 월요일에 수술 날짜를 잡았습니다.

`아버님, 저도 처음엔 목사 말만 듣고 전도관이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전도관에 나가 감람나무가 내리시는 은혜를 직접 받고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아보지 않고 어떻게 은혜를 알 수 있겠습니까?`

수술 받기 전날 일요일에 어머니와 함께 소사신앙촌 오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단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찌나 눈물이 쏟아지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궁암이라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앞이 막막했던 심정 때문이었는지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원래 성격이 조용하고 내성적인 저는 사람들 많은 곳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며 우는 것이 몹시 창피하고 부끄러웠으나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어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는데도 저는 엉엉 울기만 했는데, 갑자기 제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 병이 나았다.” 하시는 분명한 말씀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울음을 뚝 그친 저는 옆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어머니! 지금 영모님께서 제 병이 나았다고 말씀하셨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던 어머니는 “그래, 영모님이 너를 구해 주시려나 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순간부터 온몸이 말로 다할 수 없이 시원하고 가뿐해지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근심과 걱정으로 어두웠던 제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며 편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