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 한 알도 하나님의 조화로 맺어져
이번 추수감사절 사진전시실에는 1958년 소사신앙촌에서 무를 수확하는 사진이 전시되었습니다. 사진 속 모습처럼 추수의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추수와 관련된 체험기를 이번 호 특집에 모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 것은 평생의 복
추수감사절 사진전시실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니 소사신앙촌에서 즐겁게 일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제 나이 스무살 때였습니다. 원래 저는 건설대로 들어갔지만, 소사신앙촌 무밭에 무 수확량이 많다는 소식을 무 수확을 도우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수확한 무는 주민들이 사 먹을 수 있도록 소사신앙촌 내 가게에 납품되거나 건설대 밥반찬으로 만들어져 커다란 깍두기를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른 곳은 ‘흉년이다, 비가 부족하다’는 말이 나와도 소사신앙촌에서는 큼지막하게 썬 깍두기를 매일 먹을 수 있을 만큼 크고 튼실한 무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어디에 가서 일을 하든 마냥 좋아 뛰어다녔습니다. 지게에 짐을 실어 내려놓고 올 때도 신나게 찬송하면서 뛰어 내려오면 어르신들이 “신앙촌이 너를 위해 만들어졌구나!”라고 말씀하셔서, 깔깔대고 웃었던 일도 있습니다.
그동안 철없이 좋아하긴 했어도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 주시며 보살펴 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틀림없는 창조주 하나님을 직접 뵌 것은 저에게 큰 복이며 평생에 감사드릴 일입니다.
유효순 승사 / 기장신앙촌
귀한 일 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해
저는 소사신앙촌 제과부에서 근무하다가 기장신앙촌으로 내려와 영농에서 일하며 농사도 짓고, 밭일도 했습니다. 이번 사진전시실 사진처럼 기장신앙촌에서도 무 농사를 했는데, 저는 주로 무 뽑는 일을 했고, 저 외에도 지게에 무를 싣는 사람, 지게를 옮겨 차에 쏟는 사람, 식당으로 가져가는 사람 등 각자 일을 맡아 했습니다. 어느 때는 무를 큰 밭 가득 심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해 무가 얼마나 잘 됐는지 소사신앙촌 사람들까지 동원돼 무를 뽑아주고, 실어주고 한 적도 있습니다.
벼농사 때는 수확한 벼를 방앗간에서 쌀로 찧어 각 교회마다 보내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방앗간에서 제단마다 나눠 줄 쌀을 트럭에 싣고 신앙촌 농장으로 오는 길이었는데, 농장에 다다라 큰 불덩어리가 차 쪽으로 날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불성신을 체험하고 ‘나에게도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는 마음에 귀한 일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신앙촌 식당에 전달돼 많은 사람들이 먹는다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사진전시실 무 수확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나도 저 때 이런 일을 했었지’ 생각이 나면서 노구산 집회때부터 하나님을 알게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풍성하게 먹고 쓸 것을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홍경희 권사 / 기장신앙촌
하나님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느껴
저는 서울 서빙고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인근의 서빙고 기성교회를 다니긴 했으나, 비 오는 날 떨어지는 빗줄기를 재며 나갈까 말까 고민하곤 했으니 말 그대로 ‘교회 다닌다 ’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저는 어느덧 청년이 되었고, 이따금씩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매년 춘하추동 사계절이 어김없이 변하여 곡식이 자라는 것과 같이 우주 만물이 어긋남 없이 운행되고 있다면 이 오묘한 섭리를 주관하시고 운행하시는 존재가 반드시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동안 내가 건성으로 교회를 다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온전한 신앙인이 되어 하나님과의 연결함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주일학교 반사도 하고 청년회 임원도 맡는 등 교회 일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여러 부흥집회를 찾아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해 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5년 여름, 하루는 서빙고교회에 같이 다니던 김 집사님이 저를 찾아와 한강에서 열리는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 집회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의 말문이 열리는 등 수많은 기사와 이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놀란 저는 집회(한강 집회, 1955. 7. 4.~7. 11.)가 시작되는 날 저녁, 김 집사님과 다른 동료 네 명과 함께 한강 모래사장에 도착했습니다. 곧이어 박 장로님이 나오셔서 찬송가 64장을 부르셨는데, 저는 손뼉 치는 것이 어색하여 가만히 앉아 찬송만 불렀습니다. 두 시간가량 계속된 예배가 끝나자 주위 사람들은 ‘향취가 난다, 불이 내린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며 상기되어 있는데, 저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고 특별히 보이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밖에 나가 홀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받았다는 은혜를 저는 알지 못하니 주일학교 부장이니 청년회장이니 하는 직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디 저에게도 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간절히 기도를 계속 드리니 어릴 적에 어머니 심부름하며 잔돈을 떼어먹은 것, 남의 밭에 몰래 들어가 과일을 따 먹은 것 등등 아주 오래된 일부터 최근의 일까지, 크고 작은 저의 잘못들이 줄줄이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송장 타는 냄새 같기도 하고 퇴비가 썩는 것 같은 냄새가 나다가 다시 기도를 드리자 이번에는 어디선가 바람이 휙 불어오면서 백합꽃 향기 같은 진한 냄새가 맡아지며 목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입 안 가득한 그 냄새는 가실 줄 모르고 계속되며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마음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예배 때 박 장로님께서 단에 오르시니 향취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러자 박수가 절로 나오며 즐겁게 찬송을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향취 은혜는 잠시 집에 들렀을 때에도 계속되었고, 집회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향취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한강 집회를 통해 제가 경험한 은혜의 증거는, 그동안 기성교회를 다니며 그토록 갈구하였음에도 얻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박 장로님이야말로 진정 하나님과 함께하는 분이시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하나님의 존재를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용득 승사 / 덕소교회
참된 알곡이 되기를 소망해
덕소신앙촌에 들어가 주택 지대의 건물을 올릴 때 즈음 덕소신앙촌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크고 웅장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드릴 생각에 저는 기쁘게 일했습니다. 교회가 완공되고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을 때는 새벽예배를 마친 후 하나님께서 아주 커다란 인절미를 신앙촌 주민 모두에게 나눠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서울 지역 전도관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인도하신 후 덕소신앙촌으로 돌아오셔서 다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수한 바 모든 알곡 천국 창에 들인 후 주가 베푼 연회석에 우리 들어가겠네’ 하는 추수 찬송을 인도하셨는데, 찬송가 뜻을 생각하며 따라 부르던 저는 ‘나도 알곡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곡이 되고 싶은 소망으로 뜨겁고 간절했던 그날 예배는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이순덕 권사 / 기장신앙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