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담임선생 만류에도 변함없이 전도관에 열심히 출석해
오정자 권사(3) / 기장신앙촌제가 다니던 남성여중은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기성교인이었던 저희 담임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자주 전도관을 이단이라고 했는데 한번은 담임이 제 이름을 부르며 전도관에 가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급장인 제가 전도관에 계속 다니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가게 될까 봐 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전도관에서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다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박 장로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면 참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으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선생님은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후로도 선생님의 반대는 계속되었지만 저는 학교생활에 충실하면서 변함없이 제단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부산 영주동에 전도관을 새로 지을 때
수업 마치고 가서 모래 질통을 지고
높은 건물까지 날라도 힘든 줄 몰라
종일 그곳에서 일하는 어른들이 부러워
그 후 1957년에는 영주동 산언덕에 전도관 건물을 신축하게 되어 많은 교인들이 건설을 도왔습니다. 저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서 일을 도왔는데 질통에 모래를 지고 높은 건물까지 날라도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설 현장에 자주 오셔서 상황을 둘러보시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를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즐겁게 일하면서 하루하루 완성되어 가는 성전을 보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조금이라도 일을 더 하고 싶은 마음에 하루 종일 거기서 일하는 어른 분들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영주동제단이 완공된 후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제단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날씨가 어찌나 추운지 온몸이 꽁꽁 얼어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난방시설이 잘되어 있는 때도 아니고 영주동제단은 산언덕에 있어서 몹시 추웠습니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기도를 하던 어느 순간, 제 옆에 난로를 피운 듯 아주 훈훈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당연히 난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하고 의아해하다가 예전에 장례예배에 갔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몹시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장례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시신을 모신 방에는 시원한 바람이 시신 주변에 감돌고 있는 것이 느껴져
성신의 바람으로 시신을 지켜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
몹시 무더운 여름날에 어느 교인 분의 장례예배를 드리기 위해 그 댁을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삼복더위에 해가 쨍쨍한 날씨여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갔는데 시신을 모신 방에 들어가니 시원한 바람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얼음 가까이에 손을 대 보면 차가운 기운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 바람이 시신 주변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른 분들이 ‘성신의 바람으로 시신을 지켜 주시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돌아보면서 저는 이토록 추운 날씨에 예배실에서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을 느끼는 것도 은혜를 허락해 주신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196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집이 서울로 이사하게 되면서 집과 가까운 장충동제단에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소사신앙촌에 입주를 하고 싶었는데 입주 전까지 소비조합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제품 중에서 신앙촌 간장을 판매해 보기로 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간장을 한 병씩 파는 것이 아니라 큰 통을 가지고 다니며 달라는 만큼 덜어 주던 때였습니다. 저는 장사를 처음 하는 데다 숫기가 없어서 설명을 제대로 못했지만 간장을 들고 나가는 대로 다 팔리니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신앙촌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반색을 하며 간장을 통째로 사는 사람을 자주 만났는데, 그만큼 신앙촌 제품을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피부에 와 닿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결혼을 한 후 먹고 사는 일에 매이다 보니 차츰 제단과 멀어져
그러나 그렇게 살면서도 항상 신앙촌과 전도관을 고향처럼 그리워해
저는 1962년에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판매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판매부는 항상 제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서울 종로에 신앙촌 직매점이 생기면서 저는 그곳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 마련된 직매점에 신앙촌의 다양한 제품을 진열해 놓고 판매했는데 특히 제가 일하던 피아노부에서는 신앙촌의 기술로 생산한 피아노를 판매했습니다. 피아노가 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온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진 피아노는 종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덕소신앙촌의 수예 공장과 원면 공장 등에서 10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나와서 살게 되었는데 결혼을 한 후 먹고사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차츰차츰 제단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도 신앙촌과 전도관을 늘 그리워했습니다. 마음속에 두고 온 고향처럼 항상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1980년 어느 날 드디어 부산 대신동제단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예배 시간에 관장님께서 광고하기를 “소사와 덕소신앙촌에 있다가 지금 쉬고 있는 분들을 축복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번 축복일에 그런 분들과 함께 갑시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던 신앙촌에 갈 수 있다니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고대하던 축복일이 되어 기장신앙촌에 가 보니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해 주시고 안수해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귀한 자리에 그동안 오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오정자 권사님 신앙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