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넘게 마음을 나눈 고객들은 나의 소중한 추억
양금준승사(2) / 기장신앙촌< 이어서>1958년 12월에는 하나님께서 말도 되지 않는 죄목으로 영어의 몸이 되신 일이 있었습니다. 정계와 종교계가 결탁해 하나님을 투옥시킨 그때, 억울한 심정은 언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을 중상모략하는 신문 기사를 보면서 어쩌면 그렇게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믿으셨던 시아버지는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심하게 반대하시면서, 제가 이만제단에 갔다가 돌아오면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시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도리로 알고 그대로 따르며 살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누가 뭐라 해도 부인할 수 없었기에 시아버지의 반대 속에서도 제 뜻을 굽히지 않고 제단에 다녔습니다.
1960년 하나님께서 옥에서 나오시고 얼마 후 볼일이 있어 소사신앙촌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하나님을 뵐 기회가 되어 인사를 드렸더니, 저에게 “얼마나 고생했느냐?” 하시며 안수해 주시고 “잘 이겨야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제단에 다니며 시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던 제 사정을 다 아시는 듯 위로해 주시는 말씀에, 속상하고 답답했던 마음들이 한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귀한 은혜를 입었으니 꼭 이 길을 가야겠다.’는 각오를 다시금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1963년 숭인동에 동대문전도관이 세워져 그곳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시아버지가 노환으로 숨을 거두시게 되어, 동대문전도관 관장님과 전도사님들이 집에 오셔서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손뼉 치며 찬송을 부를 때 처음에는 손바닥이 탁탁 갈라지고 팔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 찬송을 부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어느 순간 시신 주위로 바람이 불면서 앉아 있는 제 무릎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생명물로 시신을 씻긴 후 보았더니 뽀얗게 피어난 얼굴에 온몸이 노긋노긋 부드러웠고 코와 그 주위 뺨에 이슬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습니다. 시아버지는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안찰을 받기도 하셨는데,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 너무나 평안하게 가셨습니다.
그즈음 저는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인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경제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미제’라고 하면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국산의 품질이 좋지 못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신앙촌 제품은 미제보다 더 좋다.”는 말을 들을 만큼 품질이 뛰어나 매장에 놓기가 무섭게 팔려 나가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제과류를 많이 팔았었는데, 덕소신앙촌에서 캐러멜과 카스텔라를 가득 실은 트럭이 저희 가게로 오면, 아침 일찍부터 가게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상인들이 저마다 많이 가져가려고 아우성을 치곤 했습니다. 날개 돋친 듯이 팔린다는 말 가지고도 부족할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많은 캐러멜과 카스텔라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장사가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장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며 하루하루를 부지런하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신앙촌 물건을 하나라도 쓰는 사람은 그만큼 축복을 받는 것이며 그것이 곧 전도가 된다는 생각에 정성을 다해 판매를 했습니다. 물건이 팔릴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그 기쁨은 세상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촌 제품이 고객들 사이에 호평을 받고 점점 많이 팔리게 되자 경제적으로도 아주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판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하나님 별을 보면서 ‘나 같은 것을 불러 주셔서 오늘 이 복을 받게 하시는구나.’ 생각하며 남몰래 감사의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고객들 집을 찾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동안 많이 느꼈던 것은 고객들이 너무나 따뜻이 맞이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문에 들어서면 고객이 뛰어나와 “왜 이제 와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며 무척 반가워했고 이웃 사람들까지 자기 집에 다 불러서는 제가 가지고 간 신앙촌 물건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소비조합원이 가는 집마다 축복을 해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고객들이 은혜를 받아 마음이 열리고 그래서 소비조합원을 따뜻하게 맞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객들과 저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든든한 친구가 되었고 함께했던 그 시간은 저에게 아주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 후 1996년 저는 한일물산 양재공장의 공장장을 맡게 되어 지금까지 신앙촌에서 일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신앙촌의 젊은 세대들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맑고 깨끗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시온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느낍니다. 앞으로 이 진리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며 힘차게 뻗어 나가기를 기도하면서 저 또한 구원을 향해 하루하루를 값지게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