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하신 일 속에 살면서 귀한 은혜를 간직하고 싶어”
이순일 / 기장신앙촌제 나이 열일곱 살이던 1955년 서울 신촌에 살 때였습니다. 이웃에 사시는 연세대 교수 사모님이 남산에서 부흥집회가 열린다며 같이 가자 하셨습니다. 저는 부흥집회에 관심은 없었지만 사모님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구경 삼아 저녁예배에 가 봤습니다.
남산광장에 천막을 치고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모여 있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단상에서 예배를 인도하셨는데 집회장이 얼마나 넓은지 너무 멀어서 단상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한창 예배드릴 때 사모님이 “얘, 향기가 나지?” 하셔서 숨을 들이쉬었더니 정말 꽃향기같이 좋은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사방에 사람들만 가득할 뿐 꽃 한송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했는데, 사모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향취 은혜라고 했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하셔서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가을이었습니다. 연세대 교수님 댁에 박태선 장로님께서 오셔서 교수님 여러 분과 가족에게 안찰해 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도 안찰을 받게 됐습니다. 안찰하실 때 눈과 배에 가만히 손을 대실 뿐인데도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팔다리를 마구 휘젓는 교수님도 있었습니다. 저도 안찰 받을 때 눈이 몹시 아팠지만 부끄러워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겨우겨우 참았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안찰을 통해 성신을 부어 주시며 속에 있는 죄가 성신으로 소멸돼 나갈 때 그렇게 통증을 느낀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렴풋이나마 박 장로님은 성신을 주시는 분인가 보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음 날부터 교수 사모님은 원효로 박 장로님 댁에 마련된 예배실로 예배를 드리러 가셨습니다. 새벽마다 저희 집 창문을 두드리며 같이 가자 하셔서 저도 따라갔습니다. 12월에는 거기서 전도관 개관식이 열렸고 날이 갈수록 사람이 몰려와 뒤쪽에 2층을 올렸어도 바깥 샛강 둑에까지 길게 늘어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듬해인 1956년 여름부터 마포 산언덕에 이만제단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어머니와 여동생을 전도해서 같이 다녔습니다. 많은 교인이 이만제단 공사장에서 일을 돕는 것을 보고 어머니와 여동생도 나가서 일을 도왔습니다.
어머니는 원래 화병으로 고생하시던 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몸으로 저희 형제를 키우셨는데, 집안의 기둥인 오빠가 6·25 전쟁 때 군인으로 나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면서 화병이 생겼습니다. 큰 돌덩이가 가슴에 올라와 있는 것처럼 항상 답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도관에 다니시면서 그 증상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새벽예배에 다녀오면 얼굴이 밝아 보이셨고 이만제단 짓는 곳에서 일하면서부터 웃으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공사를 돕는 것이 힘에 부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기 가면 기쁘고 좋다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니셨습니다.
그 후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세워지면서 어머니와 동생은 소사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어머니가 오실 때마다 신앙촌에 대해 말씀하시니 차츰 관심이 생겼습니다. 신앙촌은 주인 없는 상점이 운영되고 자기 것이 아니면 길가에 떨어진 못도 가져가지 않는다 했습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짓지 않고 자유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유율법을 어렵게만 생각했는데 신앙촌의 생활과 저의 모습을 비교하며 ‘이렇게 살아서는 구원을 못 얻겠구나.’ 하고 반성하게 됐습니다. 나도 진실되게 신앙생활을 해야겠다고 고민한 끝에 1966년 덕소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짐을 싸 들고 간 첫날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날 신앙촌에 들어온 사람들을 안찰해 주신다고 해서 제일 마지막에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제 차례가 되자 하나님께서 “세상이 재미있는데 왜 신앙촌에 왔는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 들어가기로 결정한 후에도 친구가 좋고 세상이 재미있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들여다본 듯 말씀하시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안찰을 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다시 “세상이 좋은데 왜 신앙촌에 왔는가?” 하고 물으셔서 “이제부터 신앙촌에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안찰을 받은 후 훌훌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돌아오면서 각오를 새롭게 다졌습니다. 과거의 생활을 버리고 귀한 은혜 주시는 길을 열심히 따라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들처럼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덕소신앙촌에서 지내며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세상 재미를 좇아 사는 동안 신앙촌에서 은혜 받고 맑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일하는 것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열심히 일하며 은혜 주시기를 기도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부터 허투루 낭비하는 시간 없이 집중하며 일하고자 했습니다. 그 후 기장신앙촌 양말 공장에서 일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도문을 하라고 말씀하셔서 마음속으로 계속 기도문을 하며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기도문을 하며 작업 자리에 앉았는데 근무가 시작되는 8시가 되자 형언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머리 위에서 퍼붓는 것처럼 강하게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기도문을 계속했더니 향취 또한 하루 종일 진하게 맡아져서 심지어 화장실을 갔을 때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침 8시부터 향취가 진동했습니다. 하루 내내 향취가 계속 연결돼서 맡아지니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침 8시부터 은혜를 보내 준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일하고 기도하는 것이 귀한 은혜 받는 길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1975년에는 기장신앙촌에서 함께 생활하시던 어머니가 노환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어머니는 소사와 덕소, 기장신앙촌을 거치는 동안 일손이 필요한 곳을 찾아 봉사를 다니셨는데, 저는 언제나 성심껏 일하시는 어머니를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반 권사님들이 생명물로 깨끗이 닦아 드렸는데, 원래 피부가 고운 분이긴 했지만 생명물로 닦은 후에는 아기 피부처럼 맑고 뽀얗게 피었습니다. 또 살아 계실 때보다 훨씬 고운 혈색이 양 볼과 입술에 감돌아 화장한 것보다 더 예뻤습니다. 주무시는 것처럼 편안한 어머니를 보면서 제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를 위해 애타게 눈물로 기도하셨던 어머니. 그 기도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간절하고 진실하게 기도드리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신앙촌에 들어와 새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년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돌아보니 잡념 없이 맑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일하는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을 아끼며 바쁘게 일할 때 세상 어디서도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한일물산 사장으로 재직하는 지금은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건강을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허락하신 일 속에 살면서 귀한 은혜를 간직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삶이 어디 있을까요.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맑고 성결하게 살아서 그날에 구원의 자격을 갖출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