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심을 발표하시기 위해 기다려 주신 시간

<다시 보는 신앙체험기> 前 시온고등학교 교장 석세조 (2)
발행일 발행호수 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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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라” 말씀 하신 뒤, 25년을 기다려 하나님이심을 발표

1963년 초였습니다. 비교적 건강하던 저의 몸이 쇠약해지며 온몸에 힘이 없어지고 숨 쉬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릴 정도가 되어서 급히 진찰을 받아 보니, 급성으로 온 장결핵과 폐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 제가 거의 죽게 되었다는 소문이 친척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사이신 작은아버지께서, 젊은 녀석이 죽을병에 걸렸으면서도 병원에 가기는커녕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미련한 인간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친척을 통하여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친척들이 저를 욕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소리까지 들려서, 새해 인사를 겸하여 이상이 없다는 것을 보여 드리기 위해 남동생에게 몸을 의지하여 작은아버지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달걀 한 개도 먹지 못하던 터여서 피골이 상접한 제 몰골을 보더니 그대로 병원으로 저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종로 2가에 있는 조 X-ray라는 병원에 도착한 저는 X-ray 촬영을 했습니다. 촬영을 마치고 밖에 나갔다가 온면을 조금 먹고 돌아오니 작은아버지는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 가서 누워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우리 집에는 평소에 거의 오지 않던 친척들도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친척들은 “그 병 괜찮아.” 위로하고 밖에 나가서는 울고 들어왔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X-ray 촬영 후 판독 결과는 대단히 절망적이었습니다. 작은아버지는 “이놈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며 앞으로 1주일 정도 살면 많이 사는 것이고, 만약에 죽지 않는다면 이것은 박태선 장로님, 하나님이 살려 준 것.”이라고 친척들에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지 않던 친척들까지 찾아온 이유는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의사이신 작은아버지께서 최초로 영모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몸이 쇠약해지며 장결핵과 폐결핵 앓아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며,
일주일 이상 생명이 유지된다면 하나님이 살려준 것

저의 몸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께 편지를 올렸습니다. 당시 저는 시온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대신 다른 선생님을 채용하여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다음 날 하나님께서 “네 생명은 내 손에 달렸으니까 걱정하지 말라. 내가 부를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하신 말씀을 전달받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식욕이 생기기 시작하여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그로부터 3일 후, 꿈 중에 하나님께 안찰을 받으러 갔는데, 그날 마침 공장 일로 늦게 온 남자가 몇 명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웃으시면서 “다음부터는 늦게 오면 안 해 줘.” 하시며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누웠더니 안찰을 해 주지 않으셔서 “안찰을 해 주세요.”라고 몇 번이나 요청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괜찮아. 내가 다음에 해 줄게.” 하시면서 끝내 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피골이 상접했던 저는 병세가 점점 호전되어 마당에 나가서 걷기도 하며 서서히 기력이 회복되어 갔습니다.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은 저의 병세가 호전되어 가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더는 전도관에 대해 욕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폐병은 문제가 아니라고 하시며
안찰해 주신 후 병이 나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마당에 나가서 화단 주위를 돌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동생이 뛰어오더니 “형, 안찰 받으러 오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안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꿈속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안찰 받으러 늦게 온 남자분까지 똑같았습니다. 다만 다른 것은 제가 안찰을 받는 것만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시더니 “걱정하지 마. 그까짓 폐병은 문제없어.” 하시면서 우선 저의 가슴을 8번 정도 쳐 주시고는 “쉭! 쉭!” 축복을 하면서 다시 스물서너 번이나 치는 특별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슴을 치는 동안 저는 가슴을 밤송이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다가 끝내는 ‘그만 치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참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저더러 “밤송이로 찌르는 것같이 아프지?” 하셨습니다. 안찰이 끝난 후 “이젠 됐어. 내일부터 출근해.” 하며 웃으셨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제 발로 걸어서 갔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보니 밤송이로 찌른 것 같은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학교에 출근하니 당시 김 교장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자기 아들이 폐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폐병에 대해서는 잘 안다며 집에 가 누워 있으라고 해서 1주일간 쉬었습니다. 그때 내일부터 출근하여 막 움직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인지 건강한 몸인데도 지금까지 환절기가 되면 감기란 감기는 저를 거쳐 가는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번은 1980년 어느 날, 우리 종교를 안 믿는 대학교수 2명을 데리고 신앙촌에 갔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구절구절을 지적하시며 98%가 잘못된 글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 말씀을 들은 교수들이 말하길 자기들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시는 분은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분이시다.”라며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느 축복일에는 하나님께서 인체의 구조에 대해 말씀을 하셔서 이것으로 논문을 작성하여 나도 박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받아쓰고 있는데, 갑자기 “석 교장! 박사 해서 뭘 하려고 그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라도 우리의 마음을 훤히 보고 계시는데, 속 보이게 형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면 아주 싫어하셨고 솔직한 걸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1981년도에 “내가 하나님이야.”라고 발표하셨습니다. 그다음 날 전화로 “어제 내 설교 믿어?” 하시길래, “감람나무도 가르쳐 주셔서 믿었고 하나님도 발표하시니 다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1957년도에 말씀하신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몰라.” 하신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25여 년 만에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1987년도에 관장님 모임에서 하나님께서 저더러 찬송을 한 곡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552장 찬송을 3절까지 불렀습니다. “따르리다. 따르리다. 영원토록 따르리다. 영원토록 따르리다.” 지금도 그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 생각이 나서 종종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30년 전에 벌써 죽었을 몸을 살려 주셨고 지금까지 보호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드릴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촌 분수대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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