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마다 하루에 3천리를 달려 11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시다

주일마다 하루에 3천리(1,200km)를 달려 11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시다
발행일 발행호수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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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70년대 하나님께서는 주일날 마다 기장신앙촌을 출발하여 수도권 식구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서울로 달려오셨다. 항공편으로서는 수많은 서울의 집회 시간을 정확히 맞출 수 없었기에 육로를 이용 하실 수밖에 없었는데 때마침 1970년 7월 경부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하나님의 서울행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먼 길이었다. 부산에서 서울 인터체인지까지 1070리, 왕복 2140리에 덕소신앙촌을 시작으로 서울의 8개 중앙과 인천, 소사 신앙촌을 돌고 다시 서울에서 기장까지, 장장 3000리가 넘는 거리를 오직 이슬성신의 은혜를 부어 주시기 위해 달려 오신 하나님이셨다.

◆평택에서 영접

당시 서울의 젊은 관장들은 부산에서 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하기 위해 새벽에 차를 타고 평택 인터체인지까지 나가서 기다리곤 하였다. 당시 7중앙 관장이던 이길원 전무(한일물산)의 회고이다.

“저희들은 서울로 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기 위해 경부고속도로 평택에서 하나님 차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새벽 5~6시 경이 되면 하나님 차가 지나가시는데 하나님 차를 운전하는 차권사가 멀리서 우리를 보고 라이트로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 주었어요.

그 신호를 본 저희들은 지나가시는 하나님 차를 향해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면 예배시간을 맞추기 위해 고속으로 달리는 하나님 차는 벌써 저희를 지나 수 십 미터 앞을 달리고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몸을 돌리셔서 차 뒷 유리로 저희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저희는 마음이 기뻐져서 부지런히 하나님 차를 뒤따라 갔는데 저희들 차는 속도가 느려 덕소신앙촌에 도착하면 벌써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실 때가 많았지요.”

하나님께서는 덕소 다음으로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5중앙(오전 8시 30분), 성북구 돈암동 미아리에 위치한 2중앙(오전 9시 20분), 동대문구 숭인동에 위치한 3중앙(오전 10시), 성동구 하왕십리에 위치한 9중앙(오전 10시 20분), 서대문구 합동에 위치한 7중앙(오전 11시), 용산구 청암동에 위치한 1중앙(오전 11시 50분),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4중앙(낮 12시 40분), 노량진 본동에 위치한 8중앙(오후 1시 30분)까지 서울에 있는 8군데 중앙 전도관에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신 후 인천전도관을 거쳐 마지막으로 소사 오만제단까지 11군데서 예배를 인도하신 후에야 집회 일정이 끝이 났다.

◆”나도 은혜 좀 받읍시다”

하나님께서 인천전도관에 도착하시면 박한윤 당시 인천관장이 차문을 열어드리고 하나님을 영접하곤 했다. 인천 교인 중에 김 집사라는 씩씩한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사람이 “관장님, 관장님만 은혜 받지 말고 나도 은혜 좀 받읍시다”하며 하나님 오실 때면 문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박한윤관장 대신 얼른 차문을 열어드렸다고 한다.

또 교인들 중에는 하나님의 서울 집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이차봉권사(72, 소사교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당시 소사신앙촌에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주일 대예배에 많이 참석해서 은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중앙에서 저 중앙으로 하나님을 뒤따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음 교회로 이동하시는 동안, 저는 버스나 택시를 타고 따라갔는데 교통이 막혀 예배시간을 못 맞출 것 같으면 아예 한 중앙은 건너뛰고 그 다음 중앙에 가서 하나님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당시 전도를 많이 한 교인에게는 관장님들이 가슴에 황금색 큰 별을 달아주었는데 하나님께서 단에 서시면 황금별을 단 사람들을 향해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 같으면 예배가 거듭될수록 힘이 점점 빠질 터인데 하나님께서는 집회가 거듭될수록 더욱 힘 있고 강한 설교를 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옷은 땀으로 젖어

7중앙 관장이었던 이길원 전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단상에 에어컨이 있었지만 혼신의 힘으로 구슬 같은 땀을 흘리시며 예배를 인도 하시고 내려오시면 하나님의 옷은 완전히 젖어서 넥타이 끝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서울에 오실 때 옷을 두벌씩 더 가져오셔서 갈아입으셨는데, 어느 날 옷을 갈아입으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 중에서 인류구원을 위해 가장 눈물과 땀을 많이 흘린 사람이고, 전도를 위해 가장 멀리, 가장 많은 거리를 다닌 사람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기장을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하시면 보통 9중앙이나 5중앙에서 아침을 드시고 7중앙에서 점심식사를 하셨습니다. 생선초밥과 냉면, 죽을 즐겨 드셨는데 죽을 드실 때는 7중앙 주방에서 일하던 서권사라는 분이 끓인 죽을 드시면서 ‘맛있다’고 칭찬 하시기도 했습니다.”

◆일주일마다 받는 심판

당시 하나님이 서시는 중앙 전도관의 관장들은 자신의 실수로 하나님의 은혜가 막힐까봐 전전긍긍하였다. 하나님께서 단에 서시는 순간 은혜가 막혔는지 열렸는지가 판가름 나기 때문에 절제하며 죄짓지 않는 깨끗한 생활을 하기 위해 금, 토요일엔 개인적인 외출도 삼가고 하나님이 서시는 단을 청소하며 늘 떨리는 심정으로 주일을 맞이했다고, 일주일 마다 심판을 받았던 그때의 두려웠던 심정을 회고했다.

단이 막힐 때는 하나님의 목소리가 끊겨 나오기도 했으며 하나님께서 마이크 방향을 돌려 놓으시기도 하셨는데 이럴 때면 담당 관장의 민망하고 떨리는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한번은 젊은 관장이 서는 단이 막힌다는 지적을 받았다. 아무리 회개하고 기도해도 그 이유를 명쾌히 알 수 없었던 그 관장은 하나님께 직접 여쭈어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군대 갔다 왔나?”하고 물으셨다.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날로 더해 가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위험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국방의 의무를 강조하시던 때였다.

그때서야 그 관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인 것과 병역미필 상태인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불순종하여 단이 막힌 것을 깨닫고 즉시 군에 입대하였다.

소사를 끝으로 주일 대예배를 다 마치신 하나님께서 다시 기장신앙촌으로 돌아가실 때면 교역자들은 평택까지 하나님을 배웅했고 하나님께서 추풍령 휴게소에 들리시면 근처의 경북지역과 충남지역 교역자들이 나와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말씀도 듣고 안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의 육신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왕복 3000리, 11곳의 대집회는 그 사실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희생과 권능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송미애기자sma@the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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