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훈 목사 사건

장일천 시온식품 사장
발행일 발행호수 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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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장일천 사장이 신앙촌의 젊은이들에게 신사훈 목사를 혼내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담 = 최수창, 이동훈(신앙촌 청년회)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신사훈 박사는 천부교에 대한 터무니 없는 ‘고발쟁이’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목사였던 그의 신분으로 보아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대항과 훼방은 어쩌면 숙명적인 것인지도 몰랐으나 다른 목사들과 달리 그는 이름있는 신학자요 지성인을 자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돈키호테식 좌충우돌과 저질스러운 음해는 특이한 감마저 주었다.
그에 관한 일화를 그와 가장 격렬하게 맞섰던 장일천 시온식품 사장으로부터 들어본다.

신사훈 박사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종교학과 교수였으며 대한 장로회 새싹교회 목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독 천부교에 대해 터무니 없는 모함과 비방을 일삼아 그 명성에 먹칠을 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신사훈 박사는 일찍이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를 반대하고 전도관을 반대해 왔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문 잡지 등에 천부교를 음해하는 기사를 기고하곤 하였으며 1958년에는 재판정에 나가 “동방의 의인은 고레스다. 생수란 박 장로가 손이나 발을 씻은 물 혹은 손을 담근 물을 의미하는데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며, 생명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증언하였다.

초창기에 일어났던 천부교에 대한 비방과 핍박의 소용돌이는 소사신앙촌과 덕소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잠잠해지기 시작하고 그 이후에는 누구도 천부교에 대해 흠을 잡지 못하고 조용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의 그 신사훈 목사가 다시 나타났다. 그가 모 3류 잡지에 기고를 하여 다시 한번 음해의 불씨를 지핀 것이었다. 그것도 교수요 박사의 체면에 걸맞지 않게 1957년에 김경래 등이 박마리아의 사주를 받아 세계일보(현재의 세계일보와 다른 신문. 1952년 창간)에 기고했던 저질스런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일찌기 신사훈 교수의 터무니없는 글로 전도에 막심한 지장을 받아오던 교단의 분노는 마침내 인내의 선을 넘어 폭발하고 말았다.

전도관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음해와 비방을 해 오던 신사훈 목사
또다시 뻔뻔스럽게 터무니 없는 거짓 글을 싣자 교단의 분노 폭발

교단의 청년, 교역자, 부인회 등은 해명을 요구하며 일제히 신사훈 목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신 목사의 집으로 찾아가서 벨을 누르면 밖의 동정을 살피던 신사훈 목사는 쏜살 같이 방문을 나와 집 뒤를 돌아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야트막한 대문이라 집안의 동정이 밖에서 잘 보였다. 너무도 급했던 나머지 그는 파자마 차림에 흰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도망을 가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술래잡기가 한 달 이상 계속되면서 아무런 성과가 없게되자 장일천 관장을 비롯한 청년들은 집에서 그를 만나기를 포기하고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 전화를 걸어 그를 만나려 했다.

장일천 사장: “우리가 집으로 계속 찾아가서 초인종만 누르면 파자마 바람에 고무신 신고 줄행랑을 놓는 거예요. 대문이 낮아 안이 다 들여다 보여요. 아무리 찾아가도 만나주질 않으니 그 사람이 목사일을 보는 교회로, 그것도 예배 시간에 찾아간 거지. 그래야만 이 사람을 만나겠다 싶어서 그렇게 했어요.

명륜동에 있던 그 사람의 교회를 찾아 갔어요. 마침 단에 서서 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문을 열고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서 단상 위에서 설교중인 신사훈을 향해 큰 소리로 ‘신독사’님! 이리로 내려오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불렀어요. 그렇게 더러운 입을 가졌으니 ‘목사’가 아니라 ‘독사’라고 했죠. 그랬더니 이 사람 단 위에서 꼼짝을 안 하고 그대로 서 있는거야.

그래서 내가 그 교회 교인들이 앉아있는 데로 돌아서서 교인들에게 신사훈이 한 일에 대해서 일장 설교를 했지. ‘소위 성직자라고 하는 목사가 전도관 설립자이신 박태선 장로님을 근거도 없는 비방과 모함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교인들 영혼을 죽이는 거짓말이나 일삼는 것은 여러분에게 독초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 독초를 먹고 모두 지옥에 가겠습니까?’라고.

그 순간 신목사가 단에서 뛰어 내려 뒷문으로 달아나려는 것을 보고 붙잡아 의자 아래 마루바닥에 꿇어 앉혀놓고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다그쳤습니다.”

최수창: “그렇게 하는데도 교인들 중에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요?”
장사장: 그러게 어느 누구도 꼼짝도 안 하고 아무런 말도 없이 제 말을 듣고만 있는 거예요. 자기네 목사가 그렇게 당하면 누구라도 달려들텐데,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 누가 경찰에다 신고를 했는지 밖에 종로경찰서에서 백차가 왔어요. 나는 잘됐구나 싶어서 경찰에게 가서 앞뒤 상황을 말하고 이 사람을 무고죄로 체포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신사훈은 ‘독사’와 같이 어느새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이동훈: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장사장: 신목사가 어떻게 하는지 계속 지켜봤죠. 그리고도 부인회원들이 계속 집으로 찾아가도 여전히 도망치기에 바빴죠. 교회로 전화를 해도 통화가 연결 된 적이 없어요. 출장을 갔다. 주일이래도 단에 안 섰다. 계속 핑계를 대며 만나주질 않았어요.
이동훈: “참 대단하셨네요. 선배님들의 그 열정과 의분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 시온의 젊은이들이 본받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장사장: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신사훈 목사는 그날 내 손에서는 도망을 쳤으나 이번에는 장로교회 전체가 들고 일어나 신사훈 목사를 힐책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기성교회에서는 신사훈 목사가 음해의 글을 올리자 그의 사회적 명성을 이용하여 천부교에 일대 반격을 시도할 호재로 여기고 벼르고 있었는데 정작 장본인이 도망만 다니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약이 올랐던 것이지요.

‘우리는 당신의 말이 사실인 줄 알고 박태선 장로에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그렇게 지독한 수모를 당하고서도 왜 아무 말이 없느냐?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이냐? 거짓이냐? 확실하게 답변을 해라’ 하고 다그치자 신목사는 고개를 떨구고 ‘사실 내가 쓴 것은 전에 김경래가 쓴 것을 그대로 베껴 쓴 글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하고 고백하고 말았던 겁니다.”

최수창: “저명한 신학자요 목사였던 사람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아무런 변명도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장사장: “모든 것은 영의 역사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신사훈 목사는 누구?
(1911~1998)
전북 고창 출생.
종교인, 목사.
1947년부터 1976년 8월까지 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 주임교수.
전 기독교단총연합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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