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읽은 남편은 술과 담배를 한번에 끊어버려

최분상 승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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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그러던 1958년 어느 날, 저는 남편을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전도관에서 발행되는 신앙신보를 읽어 보라고 주었습니다. 남편은 처음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한쪽으로 밀쳐 두었으나 그래도 계속 신문을 갖다 주며 권했더니 결국 펴 들고 읽어 보았습니다. 신앙신보에는 하나님의 설교 말씀이 실려 있었는데 그 말씀을 한참 동안 유심히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신보를 읽은 후로 남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마산시청에서 근무했던 남편은 퇴근 후 영화관에 들르는 것이 하루 일과일 정도로 영화 관람을 즐겼으며, 술과 담배를 무척 좋아하여 건강을 위해 끊으려고 했다가도 번번이 실패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신보를 읽은 후로 영화관에 가던 발길을 딱 끊어 버리고 술과 담배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담배를 피웠기 때문에 손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는데 그 냄새마저 역겹다고 했습니다. 그때 남편에게 마산전도관에 다닐 것을 권유했더니 다음 날부터 새벽예배에 참석하며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신앙신보를 읽고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신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신이 역사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신앙신보를 이전보다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담긴 신문이니
읽으면 하나님의 성신이 역사
남편의 놀라운 변화를 기켜보며
이전보다 신문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돼

그 후 남편은 마산제단 전도사님과 함께 부산 영주동제단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안찰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한 사람씩 안찰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배 위에 살짝 손을 얹으시고 안찰을 해 주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하나님의 손이 닿기도 전에 벌써 아프기 시작하여 안찰을 받는 동안 고통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안찰을 받고 나자 온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며 웬 기쁨인지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찰을 받을 때 아픈 것은 그 속에 죄가 있어 성신에 대항하기 때문이며 성신으로 죄가 사해짐에 따라 통증은 물러가고 시원함을 느낀다.’ 하셨는데, 저는 남편이 안찰을 받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말씀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어 많은 교인들이 입주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촌은 은혜 받은 식구들이 한곳에 모여 자유율법을 지키며 구원 얻을 준비를 하는 곳’이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은혜의 울타리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다가 1962년에 드디어 가족들과 함께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경남 사천의 고향집에 계시던 친정어머니(故 하신 권사)도 소사신앙촌에 입주를 하셨습니다.

안찰을 받을 때 아픈 것은 그 속의 죄가 성신을 대항하기 때문
성신의 권능로 죄가 씻어지면 통증은 물러가고 시원함을 느껴
그 후로는 온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워지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

원래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니는 큰언니의 권유로 사천제단에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젊으실 때부터 수십 년 동안 어지럼병으로 고생하셨는데 신기하게도 전도관에 다니면서부터 씻은 듯이 낫게 되었습니다. 한의사가 집에 살다시피 하며 계속 약을 지어 먹었어도 낫지 않았던 고질병이 완전히 낫게 되니 어머니는 항상 고맙고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신 후에는 기도할 때 이슬비 같은 것이 계속 내리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사람들 말을 들어 보니 은혜가 이슬비같이 내리기도 한다더라. 나한테도 그런 은혜를 주셨나 보다.” 하며 기뻐하셨습니다. 다른 곳에 사는 형제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으나 어머니는 신앙촌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하시며 소사신앙촌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1966년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뒤부터 저는 신앙촌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수입이 있었지만 아이들 넷을 키우고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까지 모시려면 제가 소비조합을 하며 경제적인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장사 경험은 없었지만 신앙촌 간장을 가지고 서울 청량리로 나갔더니 첫 집부터 두말없이 간장을 구입하는 덕에 금세 다 팔리게 되었고 자신감도 생겨났습니다.

젊으실 때부터 어지럼병으로 고생하던 어머니는
한의사 집에서 살다시피해도 낫지 않던 것이
전도관에 나오면서 씻은듯이 나아

그때부터 집집마다 다니며 판매했는데, 처음 가는 집인데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반기는 것은 신앙촌 제품이 확실하기 때문이며, 그 제품을 판매하는 신앙촌 소비조합을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촌 이름만 들어도 반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용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자산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판매하며 신용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언젠가 고객의 남편이 “우리 집사람은 누구 말도 잘 안 믿는 사람인데 신앙촌 아줌마 말이라면 무조건 믿더라.”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장부터 시작한 소비조합은 점점 규모가 커져서 이불과 담요, 메리야스까지 다양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불과 담요는 당시 고가의 제품으로 주부들끼리 계를 모아 구입했는데 그 사람들에게 물건을 대 주는 것만 해도 매일매일 바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렇게 소비조합을 하면서 저는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내고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편안히 모실 수 있었습니다. 경제력을 가지고 생계를 해결하며 바쁜 생활 속에서 즐겁게 일할 수 있으니 참으로 기쁘고 보람되었습니다.

(최분상 승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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