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 드려
박근성 권사(1) / 기장신앙촌저는 1929년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에서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너른 농토를 가진 부유한 지주 집안이라 어려움 없이 풍족하게 살았으며, 저는 어릴 때부터 언니들을 따라 교회에 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장로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다 해방 후 이북에 들어선 공산 정권이 지주들을 탄압하여 농토를 몰수하면서 급기야 저희 집이 죽 한 그릇을 먹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어머니께서 저라도 먼저 이남으로 내려가라고 하셔서 저는 이웃집 사람들과 함께 월남하였는데, 이후 남북이 완전히 가로막히면서 어머니와 영영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서울 남산에 정착한 저는 이북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후암동 영주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고향을 잃은 외롭고 허전한 마음에 위안을 얻고 싶었습니다.
원효로 전도관서 하루도 빠짐없이 철야기도 하며 매달려
`하나님, 이곳이 참 길이라면 저에게 답을 주십시오.`
동방의 일인, 감람나무, 이슬성신에 관한 말씀 주의 깊게 들어
같은 교회에 다니는 고향 사람(故 안원삼)과 결혼하여 살던 중에 육이오 전쟁이 터지고, 저는 피난지 대전에서 첫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뇌막염에 걸려서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되는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몇 년 동안 애타게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고치지 못한다는 대답뿐이었고, 아들의 병원비로 가산을 탕진해 버려서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조차 힘에 겨웠습니다. 어디를 보나 한숨과 걱정뿐이었던 그때, 저는 ‘예수를 잘 믿어서 천당에 가야겠다.’ 하는 희망 외에는 마음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원동 장로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이 등단하여 찬송을 인도하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집회에 열중하여 열심히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때까지 부흥집회에 많이 다녔어도 나이가 지긋한 분만 보았던 저는 30대의 젊은 청년 중에도 저런 부흥사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55년 3월에 남산에서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가 열린다며 온 교회가 떠들썩했습니다. 영주 장로교회 교인들이 전부 몰려가는 속에서 저도 걷지 못하는 아들을 업고 따라가게 되었는데,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집회장인 남산 광장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까마득하게 펼쳐진 천막 속을 들여다보니 도무지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고, 그 규모와 군중은 그때까지 제가 참석했던 어떤 부흥집회와도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집회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끝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군중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고 이곳에 왔을까? 모두들 영의 양식도, 육의 양식도 굶주린 사람들이구나.’ 집회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처럼 마음에 위안을 받고 희망을 얻고 싶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정도라면 굉장히 훌륭하신 부흥사일 거라고 짐작하면서 박태선 장로님이 나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등단하신 박 장로님은 뜻밖에도 도원동 장로교회에서 뵈었던 젊은 분이었습니다. 새하얀 와이셔츠 차림의 박 장로님을 뵈면서 ‘아! 그때 그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찬송을 인도하실 때 박 장로님의 음성은 집회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우렁찼으며, 그 속에서 배고픈 것도 없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린 채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목사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라가서 은혜를 받았다, 병이 나았다 하며 밤새도록 군중들 앞에서 이야기했고, 어떤 목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단상 위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집회장 곳곳에서는 환자들이 너도나도 병이 나았다며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런데 집회를 마치고 돌아올 때 등에 업혀 있던 아들 영환이가 갑자기 내려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를 내려놓았더니 놀랍게도 제 앞에서 또박또박 걸으면서, 거리에 지나가는 어른들을 보고 “아줌마! 아저씨! 나 다 나았어요. 기도하고 찬송하고 다 나았어요!” 하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습니다. 다섯 살이 되도록 걷지 못하던 아이가 “집까지 걸어갈 거야.” 하며 타박타박 걸어갈 때, 그 놀라움과 감사함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남산 집회를 마친 후 저는 다니던 영주 장로교회에 계속 다녔습니다. 교회 친구 중에는 한영애 집사님(현재 소사신앙촌 소속)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11월 어느 날 그분이 원효로 박태선 장로님 댁의 예배실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예배드린다고 하여 따라가 보았습니다. 이후로 저는 ‘원효로전도관’이라고 불리는 그곳에서 새벽예배나 수요일예배를 드렸으며, 한 집사님은 영주교회에 발길을 끊어 버리고 완전히 전도관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한 집사님이 저를 보고 “장로교회에 다녀서는 구원을 못 받아요. 구원을 얻으려면 전도관에 다녀야 돼요.”라고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고달프고 힘겹게 살던 저는 오로지 예수를 잘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는 소망밖에 없었는데, 장로교회에 다녀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니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구원을 못 받는다는 거지요?” 하고 물었더니, 구원을 얻으려면 은혜를 받아 죄를 씻어야만 하는데, 기성교회는 그런 은혜를 전혀 모르니 죄를 씻을 수 없으며 구원을 주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믿기지 않았지만 간곡하게 이야기하는 한 집사님을 보니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깊이 고민하고 생각한 끝에, 전도관에 나가 봐서 은혜를 받으면 계속 다니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 날부터 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원효로전도관에서 철야 기도를 하며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이곳이 참길이라면 저에게 답을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철야를 마치고 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깜빡 잠이 들어 다리가 펴지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면서 어떻게 다리를 뻗고 편하게 잘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다시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또한 박 장로님께서 성경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해 주시는 동방의 일인과 감람나무, 그리고 이슬 같은 은혜와 구원의 자격에 관한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