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관 다니며 웃는 일 많아져 ‘여기 오니 이렇게 편안하구나!’

이복례 (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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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이만제단에 다니면서 저는 “요새 좋은 일 있어요?”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항상 표정이 없던 제가 자주 웃는 것을 보고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인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여의고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저는 몹시 외로웠습니다. 한겨울 시냇물에 빨래할 때면 재잘거리며 학교 가는 또래들을 바라보다 ‘왜 난 엄마가 없을까.’ 하며 꽁꽁 언 손으로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힘겹고 서러웠습니다. 그랬던 제가 전도관에 다니며 웃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예배 시간에 향취가 진동할 때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 오니 이렇게 편안하구나!’ 한때 입양되어 엄마 아빠가 생긴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느껴 보지 못한 편안함이었습니다. 부모를 가진 사람도, 재산을 가진 사람도 전혀 부럽지 않았고 제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나를 편안하고 기쁘게 해 주시는 은혜가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세상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힘겹고 서러웠는데 전도관에 다니면서
나를 편안하고 기쁘게 해 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해

저는 이만제단에서 인상 좋은 권사님을 알게 됐습니다. 은행 지점장의 부인이었던 김 권사님은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며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도왔는데, 제 사정을 알고 권사님 집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주인 할머니의 반대가 심해져 전도관에 다니기 곤란했던 저는 그 집을 나와 권사님 댁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슬하에 제 또래 자녀들을 두었던 김 권사님이 저를 친딸처럼 대해 주셔서 매일 새벽예배에 다니며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마친 후 특전대가 전도하는 곳에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이 ‘특별전도대’로 활동하며 기성교회 목사와 성경 토론을 벌였는데 제가 따라간 날은 기성교회 학생들과 토론했습니다. “성경상의 감람나무는 누구입니까?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린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는데 그 은혜를 받아 봤습니까?” 특전대의 질문에 기성교회 학생들은 답하지 못했고 오히려 성경 구절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특전대원들은 이 땅에 감람나무가 나타나셨으니 전도관에 와서 말씀을 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다음번 예배 시간에 그 학생들이 이만제단에 찾아온 것을 보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저는 장로 임명식 때 뽀얀 구름 기둥처럼 이슬 은혜가 내렸던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진짜 은혜가 내리냐며 관심을 보이던 학생들은 그 후로 꾸준히 이만제단에 다녔습니다.

‘특별전도대’를 따라간 날, 기성교회 학생들과 성경 토론을 하게 됐는데
특전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학생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더 알고 싶어해
이만제단에 찾아온 학생들에게 이슬 은혜 본 것을 말하니 관심 보이며 전도 돼

1958년 무렵에는 김 권사님과 자녀들이 소사신앙촌에 입주하면서 저도 같이 입주해 살게 됐습니다. 꽃밭이 가꿔진 신앙촌 주택은 서울에서도 보기 드문 세련된 양옥이었습니다. 주택 지대와 공장 지대가 완공되자 그 모습을 구경하러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반들반들하고 예쁜 돌멩이를 모아 집 앞 꽃밭을 꾸몄는데, 주택 지대를 둘러보시던 하나님께서 꽃밭에 서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1958년 소사신앙촌에 입주해 살게 돼
소사신앙촌이 완공된 후 주택 지대를
둘러보시던 하나님께서 꽃밭에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 잊혀지지 않아

소사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신앙촌 사람들에게 안찰을 해 주셔서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서 한 명씩 안찰을 받았습니다. 안찰을 받으면 성신으로 죄를 씻어 주시며 내가 죄지은 만큼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배에 살짝 손을 대시자마자 아프다고 발버둥을 쳐서 붙잡아 주던 사람까지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릴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죄가 드러난다는 것이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성신으로 죄를 소멸해 주시니 이보다 고맙고 감사한 일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안찰 받는 동안 속으로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계속 기도드렸습니다.

안찰을 받고 돌아올 때 온몸에 눈이 내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가운 눈이 몸에 닿는 것처럼 시원했는데 화창한 봄날에 눈이 올 리가 만무했습니다. 계속 눈송이가 쏟아지는 느낌이 들면서 가슴속까지 시원해져서 저도 모르게 활짝 웃게 됐습니다. 속이 텅 빈 사람처럼 근심걱정 없이 싱글벙글하는 저를 보고 친구들이 “넌 입이 언제 다물어지니?” 하며 웃기도 했습니다.

안찰을 받은 후 온몸에 눈이 내리는
느낌이 들면서 가슴속까지 시원해져
계속 싱글벙글하는 모습 보고 친구들이
“넌 언제 입이 다물어지니?”하며 웃어

1960년 무렵에는 같이 살던 김 권사님이 강화도로 전도를 하러 가셔서 저도 따라가게 됐습니다. 김 권사님 남편이 강화도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지점장 사택에서 지내며 매일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전도사님과 함께 북을 치고 거리를 다니며 천막 전도관에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서울 거리에서 북을 치면 사람들이 나와 구경도 하고 질문도 했는데 웬일인지 강화도에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그러자 전도사님은 방법을 바꿔 학교 선생님들을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때 만난 교감 선생님이 전도되면서 젊은 교사들이 제단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또 강화도는 화문석 공장에서 일하는 처녀들이 많았는데, 그 처녀들이 찾아와 전도관에 관심을 보이며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천막 제단에 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터를 마련해 정식으로 강화전도관이 세워졌습니다.

(이복례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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