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제단에서 구름기둥같이 쏟아져 내리는 이슬성신을 목격

전화순 권사(2) / 기장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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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지난호에 이어서>

박 장로님께서는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어깨가 맞닿을 만큼 비좁게 앉아 있는 사이를 가볍고 빠르게 다니시면서 안수해 주신 후, 단상에서 힘찬 음성으로 “병자들은 일어나라!” 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일어났는데 저는 주변에 있던 벙어리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한마디도 못 하고 옆 사람과 손짓 발짓으로 대화하던 벙어리 남자 분이 말문이 열려서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말을 따라하자, 그분을 데리고 왔던 보호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며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또한 앉은뱅이로 들것에 실려 왔던 30대 남자 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어 보고는 “제가 앉은뱅이였는데 박 장로님께 안수 받고 이렇게 나았습니다!” 하고 외치더니 두 손을 번쩍 들어 “하나님 만세!”를 외쳤습니다. 저는 놀랍고 신기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가집이 대부분이던 그 시절에 건설된 소사신앙촌
현대식 주택, 잘 가꿔진 꽃밭, 힘차게 돌아가는 공장들을
둘러보니 마치 별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렇게 집회에 참석한 후부터 온 가족이 함께 인천제단에 다니면서 새벽예배에도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하나님께서 서울 원효로 구제단의 주일예배를 마치신 후 인천제단으로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고속도로도 없고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이 대부분이었던 그 시절, 하나님께서는 대도시부터 시골 구석구석까지 방방곡곡에서 열리는 개관집회에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친히 가셨습니다. 귀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 그토록 애쓰셨던 하나님, 세월이 흘러도 그 사랑과 희생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인천전도관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금자리’인 앞자리에 앉기 위해 예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부터 미리 가서 준비하며 기도드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숭의동 언덕에 웅장한 교회 건물을 신축한 뒤로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늘어나서 그 넓은 제단에 입추의 여지없이 빼곡히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인천전도관이 신축되고 몇 개월 뒤인 1957년 4월, 서울 청암동에 이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만제단이 완공되어 낙성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집회에서 저는 뽀얀 구름 기둥 같은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바로 이슬 같은 성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구름 기둥 같은 이슬성신이 어떤 사람에게는 한없이 쏟아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어도 은혜는 합당한 자에게 내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내린 이슬성신이 사진에 찍혀서 지금도 남아 있는데, 사진을 볼 때마다 집회에서 직접 보았던 이슬성신이 뚜렷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해 11월부터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초가집이 대부분이던 시절이었는데 소사신앙촌에 질서 있게 세워진 현대식 주택과 잘 가꾸어진 꽃밭, 그리고 힘차게 돌아가는 공장을 둘러보면 마치 별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 1958년 여름에는 소사신앙촌 노구산에서 대집회가 열려 수십만의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산 정상의 드넓은 터를 가득히 메운 사람들은 소나기에 흠뻑 젖으면서도 자리를 떠날 줄 모른 채 오직 기쁨만이 가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 1958년 12월, 하나님께서 투옥되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급속도로 뻗어 가던 전도관과 신앙촌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정계와 종교계가 결탁하여 하나님을 구속 수감하자, 신문을 비롯한 각종 언론매체들은 하나님과 전도관, 신앙촌에 대해 악의적인 비방 기사를 매일같이 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어에 계시던 어느 겨울날, 교인들 여러 명이 동네를 돌면서 심방을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방문할 교인들의 가정이 많아서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다 함께 잔잔한 찬송을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심방을 다니던 중 한 동네에 갔더니 코흘리개 어린아이 몇 명이 저희를 알아보고는 “전도관이다!” 하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고 침을 뱉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어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옥중에서 당하시는 그 고통은 얼마나 기가 막히실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메어 왔습니다.
그 즈음 이웃집 할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전도하여 인천제단에 다니셨던 그분은 나중에 식구들 예닐곱 명을 전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입관예배 때 축복 캐러멜을 넣고 끓인 물을 축복 솜에 적셔서 시신을 닦아 주었는데, 고인의 모습은 70대 할아버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환하게 피어서 입술에는 발그스름하게 핏기가 돌았으며, 살아 있는 분에게 옷을 입히는 것처럼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수의를 입혔습니다. 저는 제가 전도한 분에게 진심을 다해 드리고 싶어서,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날 때까지 그 집에서 일을 도우며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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