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제단(3) 제1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
새벽부터 밤까지 지방순회 하시던 하나님 틈틈이 공사 둘러보시고 은혜 주셔이만 제단이 건축되고 있던 청암동 ‘택한정산’은 산 위에 ‘택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붙여 진 이름이다. 한강을 굽어보는 명당으로서 근처에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다. 용산이 구불구불 뻗어 내려가다가 한강 쪽으로 튀어나온 듯한 지형을 갖고 있었으므로 용머리라고도 칭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이 용산의 구불구불한 산줄기를 용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일대는 옛적에 도원경(桃源境) 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복숭아 꽃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용의 머리를 찍어 이만 제단을 세우심으로 은혜의 제단을 삼으셨던 것이다
이만 제단 공사 총 책임자로는 침착하고 책임감 있었던 김동원 장로가 임명되었고, 현장 건설대 책임자로는 뚝심과 박력으로 소문났던 ‘불도저’ 장세호 집사가, 철 구조물과 용접 부문 책임자로는 건축 경험이 많았던 김택곤 장로가 임명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세우시고 특별 안찰과 힘을 주셔서 3두 마차가 주야로 일심동체가 되어 힘차게 밀고 나가게 하셨으며, 또한 교인들은 받은 바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어떤 이는 만사를 제쳐놓고 이만 제단 공사에 앞장섰던 것이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일했던 이영호(69세, 서대문 교회) 전직 관장의 증언을 들어 본다. “그때 현장에는 약 30여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은혜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작업 중에 철제 기둥 하나가 넘어지는 사고가 났었습니다. 사방으로 로프를 걸어 잡아당기면서 기둥을 세우다가 한쪽에서 로프를 놓친 것입니다.
육중한 그 철제 기둥은 곧바로 내게로 넘어지면서 내 가슴을 정통으로 쳤습니다. 나는 그 충격으로 땅바닥에 나뒹굴어 졌는데 일어나 보니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고 아픈 데도 없이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높이 수십 미터에 직경 수십 센티나 되는 철 기둥에 얻어맞았으니 치명상을 입었을 터인데 하나님의 지켜주심으로 털끝 하나 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그날 밤 하나님께서 공사 현장을 둘러보려고 오셨을 때 나는 멀쩡하면서도 얼른 달려가 안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쁜 일정을 쪼개어 야간에 이만 제단 공사 현장을 둘러보러 오시곤 하였는데 비계(아시바)가 매어진 것을 딛고 이 층, 삼 층 높이까지 올라가서 둘러보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시고 뒤에서 올라갔는데 신기한 것은 전등도 없고 달빛도 없는 깜깜한 밤중인데도 하나님 주위는 환한 빛이 비추어 오르고 내리시는데 아무 불편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 내 발걸음을 내가 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발을 잡아주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두 번이나 특별 집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만 제단 건축에 힘을 기울이셨는가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전도관이 우후죽순같이 세워지고 있었고 교인들은 물밀듯이 모여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지방 순회를 하고 계실 때였다.
그 일정을 보면 주일날 새벽에 인천 전도관을 시작으로 예배를 인도하신 후 소사 전도관(현 부천전도관)을 거쳐 오전 11시에 이만 제단에서 주일예배를 인도하셨다. 1956년 9월부터는 공사가 진행 중인 이만 제단에서 천정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주일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만 제단 예배가 끝나면 곧바로 보은으로 직행하셔서 그곳에서 일박하시고 음성, 진천, 청주, 조치원, 대전, 논산, 이리, 전주, 광주, 군산, 목포까지 집회를 인도하시고 토요일에 상경하셨다.
경상도 쪽으로 가실 때는 당시의 유일한 공항이었던 여의도 비행장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향하셨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마산, 삼랑진, 진주, 대구, 김천 등에서 집회를 인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산에 가시면 당시 부산시의회 우덕순 의장의 인척이던 양성모씨의 초대를 받곤 하였는데 두 사람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간절히 사모하였던 것이다. 양성모씨의 자택은 수목이 울창하고 화원이 잘 가꾸어진 훌륭한 저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잠시도 쉴 사이 없이 계속 지방순회를 하시고 토요일에 돌아오시면 먼저 이만 제단 공사 현장에 오셔서 당신의 고달프심과 피곤하심을 다 숨기시고 만면에 미소를 띈 인자한 모습으로 일일이 안수와 안찰로 한없는 은혜를 부어 주심으로 더욱 열심히 봉사하는 수가 날이 갈수록 늘었고 건설 현장에서는 은혜와 향취 속에 찬송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손선보 승사(72세, 기장신앙촌)의 증언이다.
공사 기간 중 체육대회, 은혜 창파 속에 남녀노소 교인들은 뛰고 달리며 즐거워해
이만 제단 건설 기간중인 1956년 10월 16일부터 이틀간 서울 운동장에서는 제1회 전국 전도관 체육 대회가 개최되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임석하신 가운데 윤치영 씨 등 정부 고관들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수 만명 교인들이 참석하는 대성황이었다.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는 이 후에도 계속하여 개최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스포츠를 통하여 심신을 건강케 하고 단결심과 사기가 고취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체육대회가 개막되고 경기 시작전에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대 예배가 있었는데, “말이 체육대회지 심령 부흥 대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참석자 모두가 은혜의 창파 속에서 달리고 뛰며 즐거워했으니까요.” 라고 손선보 승사는 회고하였다. 이만 제단 공사 중 벽돌이 무너져 허리와 다리가 부러졌던 최성녀 권사가 안찰을 받고 즉시 일어나 릴레이 시합에 출전하여 우승한 것이 바로 이 체육 대회 때였다.
1956년 10월 15일자 본지에 의하면 당시의 경기종목은 배구 농구 등이었고 어린이들의 소 운동회와 찬조 유희, 다수 교인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참가하는 달리기 등이 있었다. 특히 서울전도관 찬양대와 해병대 군악대가 참가하여 합창과 군악 연주로 체육대회의 흥을 돋우었다.
서울전도관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등 전국 전도관에서는 체육대회에 대비하여 서로 우승하려고 맹렬한 연습을 했는데 우승을 차지한 것은 마산전도관이었으며 제1회 전국전도관 체육대회 우승기는 마산전도관으로 돌아갔다.
본지 1956년 11월 3일자 보도에 의하면 우승을 차지한 마산전도관에서는 우승 축하예배를 드린 후에 “그 우승의 기쁨과 함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고 불신자에게 전도를 하기 위해”마산 시가지를 가두 행진 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선두에 마산상고의 밴드부가 서고 선수단, 유년주교, 학생, 일반 교인의 순서로 동양호텔을 출발하여 마산전도관까지 행진하였다. 할렐루야 소리 우렁차게 외치며 북치고 찬송하는 소리에 많은 시민이 모여들어 구경하였으며 전도관의 기세를 더 한층 높였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