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 제단(2) 착공과 공사 진행

수많은 사람들 장소없어 우선 벽만 쌓고 예배
발행일 발행호수 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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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 이만제단 건축 도중 벽만 올리고 지붕은 아직 덮지 않은 상태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1956년 7월 천부교 최초의 초대형 교회인 이만 제단 건축 공사가 드디어 서울시 마포구 청암동 ‘택한정산’에서 시작되었다. 6·25 전쟁 이후의 피폐한 경제상황 속에서 당시의 기성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의 원조를 받아 조그만 교회 하나를 짓는데도 몇 년이 가도록 완성을 못하는 실정이었다.

동양 최대의 교회인 이만 제단은 우선 그 규모에서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으로서 오직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졌다.

원효로 전도관 부인회 총무이던  최효신 권사(해군참모차장 김일병 소장 부인, 김일병 씨는 원효로 전도관 지도부장으로 재임)가 하나님의 기도하심으로 자기 친구의 말기 암이 완치되는 기사 이적을 보고, 불도저를 구하여 산을 깎아 제단 터를 닦아 놓자 신도들은 개미의 역사를 이루어 교회를 쌓아 올렸다. 하나에서 열까지 성신의 역사로 이루어졌고 만 가지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되어졌다.
당시에 이만 제단 건축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체험기를 들어 보기로 한다.“나는 원효로 구제단에서 은혜를 받고 이만 제단 건설 공사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현장에 가 보니 이만 제단이 건설되고 있던 청암동 산꼭대기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우물도 없고 수도도 없어 건설 공사에 필요한 엄청난 물은 전부 가까이 있는 마포 한강에서 지게로 길어 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자원 봉사자들간에 물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었는데 지게로 한강물을 길어 산꼭대기에 있는 드럼통에 갖다 붓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곳 같았으면 힘든 일을 서로 피하려 했겠지만 그때 우리들은 은혜를 더 받으려는 욕심에 서로 다른 사람보다 힘든 일을 하려고 경쟁하였습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물지게를 서로 뺏으려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는 물지게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밥을 먹을 때도 지게를 깔고 앉아서 먹었습니다. 간식으로 수제비에 간장, 다꽝이 나오곤 하였는데 그 맛은 꿀맛 같았습니다. 은혜는 계속 강하게 연결되었으며 향취는 온종일 진동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이 되어 제단의 종각을 올릴 때는 날이 추워 물이 얼어붙었으므로 소금물을 타서 시멘트를 배합하였습니다.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밤을 낮 삼아 일을 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지방 순회의 바쁘신 일정 중에도 수시로 오셔서 안수를 해주시며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어느날 밤 12시가 넘어 하나님께서 직접 작업 현장에 오셔서 일하는 우리들을 불러 모으시고 우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일곱 가지 축복을 해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작업이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힘으로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김원태, 67세. 소사교회)
“1956년 이만 제단을 지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긴 쇠장대를 받쳐 놓고 일을 하던 중, 느닷없이 그 쇠장대가 쓰러질 찰라, 사람 많은 데를 피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사람 없는 사이로 그 육중한 쇠붙이가 살짝 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3층에 벽돌을 쌓고 있는데, 벽돌 하나가 떨어지면서 중간에서 갑자기 멈추더니’왔다 갔다’ 하면서 그 밑의 사람들이 다 피한 다음에야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공사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이웃 할아버지가 손자를 업고 와서 이 광경들을 봤는데, 얼마나 놀라고 감탄했는지 모릅니다.

또 하루는 3층 높이로 비개를 매어 놓은 후 드럼통을 반 잘라 두 통에다 시멘트를 개어 놓고 벽돌을 쌓던 도중, 그 비개 널판지가 무게를 못 이겨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저는 무너진 벽돌더미 속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그 벽돌더미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숨이 막혀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고 큰 소리로 기도를 드렸는데, 그 기도 소리를 들은 아이가 일하는 아저씨에게 ‘벽돌더미 속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고 소리를 쳐서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허리도 부러지고, 다리도 부러져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지방으로 집회를 가셨었는데, 우리에게 사고가 난 것을 미리 아시고 다른 일정을 취소하신 채 급히 숙소로 오셔서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가슴이 무척 답답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계속 기도만 드리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안찰을 끝내신 후 돌아앉으시면서 ‘가슴이 답답하지? 내 눈만 봐라.’ 하시며 가슴을 세 번 쳐 주시고, 이마를 치시면서 ‘일어나라.’고 하시기에 벌떡 일어나니, 몸만 부어서 무거울 뿐 아픈 곳은 하나도 없어서 바로 나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 서울운동장에서 제1회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사람들이 저에게 릴레이 경주에 나가 보라고 하기에 다리를 움직여 보니 괜찮아서 출전을 하여 뛰었는데, 뜻밖에도 1등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크게 다쳤던 사람인 것을 아시는 하나님과 많은 분들이 우레 같은 박수 갈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때 상으로 성냥 한 통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최성녀 권사 신앙체험기 중에서)
“1956년 7월 이만 제단이 착공되어 저도 이만 제단 공사 현장에 나가 다른 교인들과 함께 줄을 서서 벽돌을 나르기도 하고 질통을 지고 시멘트와 모래 섞은 것을 나르기도 하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함께 하는 일이라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온 교인들은 제단 밑에 있는 시멘트 한 포대씩을 가지고 제단까지 날랐습니다. 저도 시멘트 한 포대를 머리에 이고 제단을 향해 올라가는데, 시멘트의 무게도 만만치가 않고 제단으로 가는 길이 가파랐기 때문에 조금 올라가자 상당히 힘이 들었습니다.
시멘트의 무게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져 이제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습니다. 내려놓고 갈 수도 없는 일이어서 ‘하나님! 힘을 주세요. 제가 힘이 없어서 더 이상은 못가겠습니다.’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하며 발걸음을 간신히 옮기는 중, 순간 누군가가 머리에 이고 있는 시멘트를 번쩍 들어준 것처럼 시멘트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머리에 이지 않은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만 제단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주명수, 79세. 기장신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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