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은 후 어릴적 지은 양심의 가책이 괴로워 못견뎌

조남일 관장(1) / 진주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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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8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1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이 농사를 크게 지으시고 여러 가지 사업을 하셔서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생활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가족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자주 불공을 드리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조숙한 편이었는데 사춘기에 접어들어 6·25 전쟁을 겪고 무참히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살아야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 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전도관 다니면서 밝아진 사촌언니보며
전도관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조건 전도관 가지 말라는 목사 말에직접 알아보려고 홍제동전도관 찾아가

그 후 저는 스무 살 무렵에 서울 신설동에서 살게 되면서 교회에 나가자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친구들이 성경 구절을 가르쳐 주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고 했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저는 교회에 나갈 생각이 별로 없었으나 친구들의 거듭된 권유에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집과 가까운 신설동 장로교회에 나갔더니 목사와 어른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교회에 점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하나님을 믿으며 바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예배에 참석하고 주일학교 반사로 활동하며 나름대로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1962년 어느 일요일 제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날이었습니다. 목사가 설교 중에 이야기하기를, 다른 교회는 다 가도 전도관은 절대 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무조건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얼마 전부터 전도관에 다닌다고 했던 사촌 언니가 떠올랐습니다. 외삼촌 댁에 갔을 때 사촌 언니가 찬송가를 부르며 즐거워 보이기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전도관에 다닌 뒤로 항상 기쁘고 즐겁다고 했습니다. 저는 언니가 싱글벙글 웃으며 밝아진 것을 보면서 전도관이 좋은 곳인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무조건 전도관에 가지 말라는 목사의 말을 듣고 의아해졌습니다. 아무래도 나쁜 곳이니까 못 가게 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언니를 볼 때는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습니다. 매사에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했던 저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홍제동 산언덕에 있는 교회 건물이 전도관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저는 그날 저녁에 홍제동전도관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기쁨으로 상기된 그분들의 얼굴을 보며 저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몇 년 동안 장로교회에
열심히 다녔어도 은혜를 몰랐는데 전도관 교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성경과 은혜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저녁예배에 참석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봤는데 모두들 무릎을 꿇고 앉아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를 때는 전도사님이 손뼉을 치라고 하면서 성경에 보면 손뼉을 치며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라는 구절(시편 47:1)이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찬송할 때 손뼉을 친 적이 없었지만 성경에 그런 구절이 있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처럼 손뼉을 치며 찬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제가 장로교회에서 왔음을 밝히고 전도사님과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전도사님의 첫마디가 “성경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믿지 마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은 성경 호세아서에 ‘이슬같이 내리는 은혜’(호세아 14:5)가 기록되어 있으며 전도관에는 실제로 그 은혜가 내린다고 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전도관 교인들이 각자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아주 좋은 향기를 맡았다거나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한 병이 전도관에서 은혜를 받고 나았다고 했습니다. 기쁨으로 상기된 그분들의 얼굴을 보며 저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몇 년 동안 장로교회에 열심히 다녔어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전도관 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성경과 은혜에 대하여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밤늦게까지 토론을 계속하고 돌아온 저는 전도관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습니다. 전도관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나도 은혜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전도관에 나오라고 권유한 사람은 없었지만 저는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음 날부터 홍제동전도관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새벽 일찍 준비해 누구보다 먼저 제단에 나가서 ‘저에게도 은혜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일요일이 되었을 때 마포에 있는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박태선 장로님께서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신다고 했는데, 박 장로님은 전도관을 세우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단상에 올라오신 박태선 장로님을 뵈었을 때 저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박 장로님 뒤쪽으로 달무리 같은 광채가 둘러져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잘못 본 것인가?’ 하며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찬송을 부를 때는 예배실 가득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옷을 만져 봐도 젖지는 않는데 분명히 이슬비 같은 것이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뵌 박장로님 모습 뒤로
달무리 같은 광채가 환하게 빛나고
이슬비 같은 것이 쏟아지는데도
신기하게도 옷은 젖지를 않아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찬송을 부르고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무슨 이유에선지 눈물이 쉼 없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한참을 울고 나자 온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는데 마치 큰 바윗덩이에 눌려 있다가 거기서 벗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일이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살 때였는데 제가 실수로 이웃집의 닭을 죽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닭이 우리 집 마당에 자꾸 들어오기에 겁을 줘서 오지 못하게 하려고 장대를 던졌는데 하필이면 장대가 등에 정통으로 맞아서 닭이 죽고 말았습니다. 닭 주인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였고 저는 제가 그랬다고 밝히지 못한 채 끙끙 앓다가 서울에 이사 온 뒤로 잊어버리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10년도 더 지난 일이 예배 시간에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잘못을 숨긴 죄가 양심의 가책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머릿속에 그 일이 계속 떠올라 괴로워하던 저는 돈을 가지고 부여의 고향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 집 주인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밝히며 저의 잘못을 이야기했더니, 하도 오래 전이라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서울에서 여기까지 내려왔냐며 놀라워했습니다. 제가 닭 값으로 준비해 간 돈을 드리자 “닭은 우리가 먹었는데 어떻게 돈을 받겠나.” 하며 극구 사양하여 돈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저는 잘못을 밝히고 나니 마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훌훌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조남일 관장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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