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으니 나쁜 생각을 갖지 않으려 조심하게 돼”

윤경희 권사(1)/ 전농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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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희 권사/전농교회

윤경희 권사 / 전농교회

저희 집에는 콘코네 연습 교본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30년도 더 된 낡은 책인데 그걸 보며 발성 연습하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선명합니다. 교인들 네 명이 음악 관장님께 레슨 받으며 소녀처럼 깔깔대고 웃었던 일이며, 하나님께서 연습 잘하라고 격려해 주셨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뛸 듯이 기뻤던 일이 영화 필름 보는 것처럼 떠오릅니다. 1986년 시온합창단의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앞두고 한창 노래를 배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저는 시온합창단에 가입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세종문화회관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공연장이지만 1980년대에 거기서 연주하는 것은 저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굉장한 영광이었습니다. 저 같은 40대 단원부터 학생들까지 1,500명이 하이든의 ‘사계’며 외국가곡을 익히기 위해 기장신앙촌에 모여 단체 레슨을 받고 각자 교회에 돌아가 연습했습니다. 매주 축복일이면 하나님께서 그 많은 단원을 일일이 축복하시며 은혜를 주셨습니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아도 소용없던 천식이
하나님께 축복받고 나니 사라져
합창단원 중에도 은혜 받고 병나은 사람 많아
합창을 통해 은혜를 주셨구나 느껴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그때 축복받고 오랫동안 앓아오던 천식이 깨끗이 나은 것입니다.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받아도 소용없어 고질병으로 단념하고 살았는데 어느 날 기장신앙촌에서 축복을 받고 나니 매일 달고 살던 기침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숨이 차고 가랑가랑하던 숨소리도 편안하게 바뀌어서 내가 언제 천식을 앓았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합창단원 중에 저 말고도 은혜받고 축농증이 나았다거나 고질병이 나았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합창을 통해 큰 은혜를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56년 진명여고 1학년 때 전도관에 나오게 된 것도 합창이 계기가 됐습니다. 예전에 같은 교회 다녔던 친구가 같이 합창을 하자며 데려간 곳이 원효로에 있는 전도관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니가 전도관에 다니고 계셨고 저도 하나님께서 남산집회 하실 때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잠깐 관심을 가졌지만 굳이 전도관에 다녀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다녔고 친구도 많은 신당동 중앙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호기심에 따라가 본 전도관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학생들이 전부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을 만큼 열심이었고 노래 수준도 높아서 헨델의 대곡을 맹연습 중이었습니다. 합창하는 재미에 한동안 전도관과 중앙교회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전도관으로 마음을 정한 것은 어머니 권유도 있었지만 전도관에 가면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서 마음이 자꾸 이끌렸던 이유가 컸습니다. 제가 정식으로 전도관 교인이 된 것은 1957년 1월 1일이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다니게 된 전도관은
노래 수준이 높아 합창하는 재미 느껴
전도관에 가면 갈수록 왠지 모르게
기쁘고 즐거워서 마음이 이끌리게 돼

그해 4월에는 마포 언덕에 큰 전도관이 세워져서 정식 이름으로 ‘서울중앙전도관’이라 불렀고 이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 해서 이만제단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만제단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였는데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콩나물시루도 그렇게 빽빽할 수가 없었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하나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며 한 명 한 명 안수해 주셨는데 뒷사람 무릎 위에 앉다시피 하며 비좁게 있던 저는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줄을 맞춰 앉은 것도 아니고 겹겹이 붙어 콩나물시루보다 더 빽빽한 곳을 지나가시며 안수하실 때 혹시 나를 못 보고 빠뜨리시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것처럼 훌훌 가볍게 가시면서 어른들은 물론 엄마 등에 업힌 갓난아기까지 빼놓지 않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제 머리를 탁 하고 가볍게 안수하고 지나가시자 어디선가 좋은 향기가 바람처럼 불어와 맡아졌는데, 그때는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쳤지만 그 후로 향취를 강하게 체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훌훌 가볍게 지나가시면서
어른들은 물론 등에 업힌 갓난아기까지
빼놓지 않고 안수해 주신 하나님

이만제단이 완공된 후 하나님께서는 서울 지역 교인들을 위해 무더기 심방을 다니셨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구역을 다니며 집회하셨고 그때마다 교인들이 무더기로 따른다고 무더기 심방이라 불렀습니다. 시내 공터에서 집회하다 보니 일반인도 호기심에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때마다 저희 학생들은 안내하고 질서 잡는 일을 했습니다. 한번은 돈암동을 무더기 심방하실 때인데 집회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학생들 다 오라 하셔서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아주 좋은 향취가 진동하는데 코끝을 스치는 정도가 아니라 향취가 머릿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코에 맡아지는 것처럼 아주 강하게 진동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 감사합니다!”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학생들끼리 모여 앉으면 오늘 향취 은혜를 받았다, 불성신을 받았다 하며 은혜받은 이야기가 화제였는데 말로만 듣던 향취 은혜가 이거구나 싶었습니다.

무더기 심방 때 집회가 끝나고
학생들 안수해 주시는데
하나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아주 좋은 향취가 머릿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코에 맡아지는 것처럼 강하게 진동해
말로만 듣던 향취 은혜가 이거구나 싶었고
“아! 감사합니다” 탄성이 터져 나와

집에 오는 동안에도 향취가 몸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강하게 진동하면서 전에 들은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은혜를 간직하기란 무척 어려워서 조금만 나쁜 마음을 먹어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고 은혜가 떠나고 나면 그렇게 아쉽고 안타까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모르는 사이 향취가 떠날까 봐 노심초사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대문이 보였습니다. 동생들과 다투기라도 하면 은혜가 떠날 텐데 싶어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었습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은혜를 간직했는지, 아니면 넷이나 되는 동생들과 다퉈서 은혜를 금방 잃고 말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게 떠오릅니다. 강하게 진동하는 향취 은혜를 받고 보니 천하의 보물을 얻은 것보다 귀하게 느껴져서 은혜를 간직하려고 저 스스로 나쁜 마음과 생각을 갖지 않으려 조심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고 보니 누가 오라는 사람이 없어도 매일 전도관에 가고 싶었습니다. 친구들 몇 명이서 새벽예배에 나갔는데 약수동 저희 집에서 마포 이만제단까지 떠들며 찬송하며 신나게 다녔습니다. 그래도 새벽예배에 사람이 많아 앞자리 앉기가 하늘의 별 따기여서 나중에는 전날 저녁부터 제단에 갔습니다. 그즈음 이만제단에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위주로 특별전도대가 조직될 때 저도 가입했습니다. 특전대는 정해진 일과가 있어서 성경 공부, 합창 연습, 노방 전도 등 시간표대로 움직이다 보면 하루해가 짧았습니다.

감람나무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호세아 14장 읽으며 내가 받은 은혜와
그 은혜를 주시는 존재가
성경에 기록돼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해

성경 공부는 하나님께서 성경 구절에 대해 풀어 주신 말씀을 주제별로 나누어 자세히 공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감람나무에 대한 성경 말씀을 배우며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라는 찬송처럼 말씀 공부가 정말 달고 맛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감람나무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호세아 14장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감람나무가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고 향기를 발하는 존재라는 구절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내가 직접 받은 은혜와 그 은혜를 주시는 존재가 성경에 기록돼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장로교회에 다녔어도 성경이 재미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말씀이 그렇게 재미있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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